[칼럼] [김종복 수필집, 아름다운 반칙] 생명의 봄을 기다리며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4-05-07 14:38:08


김종복 수필가

부산 출생

전 강원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

2013월간 수필문학’ <도보여행><고양이 일기>로 등단

전 춘천수필문학회 회장,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강원수필문학회, 강원문인협회, 춘천문인협회에서 동인활동

 

생명의 봄을 기다리며

 

노란 순이 몇 개 삐죽 올라온 무 꼭지의 생명력이 가상하다. 접시 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다. 설날 차례상에 올릴 무채 나물을 썰다가 생긴 부산물이다. 설 연휴 동안에 조그만 노란 순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여섯 살을 뽐내는 손녀가 좋아하며 생명의 신기함에 손뼉을 쳤다. 손녀는 제집으로 갔지만, 접시 물이 마르지 않도록 매일 물을 주었더니 잎줄기들이 날로 쑥쑥 자라 마침내 꽃을 피웠다. 꼭 스무날만이다. 아내와 내가 무꽃을 보며 감탄하는 그 날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가족의 뉴스를 접했다. 어찌 그들은 생명줄을 놓았을까?


모든 생물은 절대 생존력의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동물보다 식물이 살고자 하는 생명력이 더 강하다는 과학자의 글을 읽은 적 있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한곳에 머문 상태로 생존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오래전에 식탁에서 관상용 고구마 순을 키우다가 그냥 버리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성한 잎들을 피운 고구마가 불쌍해져서, 아파트 정원 구석 자리에 슬며시 심어 준 적이 있었다.


식물이 가진 초능력 유전자의 조정에 내가 혹시 홀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 식물 우월론에 내 상상을 접목은 시켜보았어도, 사람이 식물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가족의 자살이라는 소식을 접하니 왠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생명력이 무청 잎사귀보다도 못한가 하는 회의가 든다.


박완서 작가는
옥상위의 민들레단편 속에서 사람의 자살을 예방하는 방안을 꼬마 주인공을 통해 제시했다. 초등 학령에 미달인 꼬맹이는 엄마가 친구와 나누는 전화 대화를 들었다. 말도 안 듣고 말썽만 피우는 막내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우스갯소리를 아이는 곧이곧대로 듣고,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죽어야겠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간다.


떨어져 죽더라도 쉽게 발견되지 않을 밤이 오길 기다리던 맹랑한 아이는 달빛 속에서 민들레를 발견한다
. 옥상 한곳에 모인 하찮은 먼지 더미 속에 뿌리를 내린 꽃을 보며, ‘어찌하든 산 것은 살아야 한다라는 강한 생명력을 아이의 눈으로 깨닫는다. 그를 애타게 찾고 있던 집으로 돌아왔지만, 옥상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다는 말은 감추었다.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이 며칠 간격으로 베란다에서 떨어져 자살하자
, 집값 하락을 막고자 자살 방지 대안을 위한 주민 회의를 열었다. 마땅한 대책이 없다. 엄마를 따라갔던 꼬마가 옥상의 민들레 생각을 말하려 했지만, 당황한 엄마가 그를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아이는 혼자 숨겨온 그 이야기를 못 하고 만다. “자살을 막으려면 베란다나 옥상에 민들레를 심으세요.” 소년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작가는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사람들이 닮기를 바라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사람 잘 죽지 않는다. 내 나이 구십이니 많이 살았다. 네 처는 아직 젊으니 아파도 곧 나을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라.” 모친도 아프고 아내도 아파서, 근심이 깊은 내게 작년 봄날 병원으로 함께 가다가 하신 말이다. 초등학교 문턱도 못 가신 분이지만 긴 인생 속에서 숙성된 지혜의 말씀이었다. 위로가 크게 되었다.


내 친구는 우리나라의
IMF 사태로 사업에 실패했다. 빚쟁이의 청부를 받은 깡패들에게 무서운 빚 독촉에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너무 절망하여 죽고 싶었다. 죽기 전에 그를 무척 사랑해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러 갔다. “선하게 살아온 집안의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단다.” 손자의 형편을 얼굴만 보고도 금방 읽으신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에 용기가 났다
. 절망도 삶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긍정의 힘이 그에게 생겼다. 살아야겠다는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더니, 정말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참고 기다리면 잘 사는 날이 꼭 온다.” 이 말은 지금은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내 친구의 인생 좌우명이 되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오늘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 살만한 내일이 꼭 올 것이다. 사람이 설령 식물보다 생명력 보존의 원초적 유전자가 열등하더라도, 인간은 생각하는 유전자가 있지 않은가. 절망에 부딪혀도 조금 물러나 기다려 생각을 해보면 살길을 찾을 수 있다.


소년이 옥상에서 민들레를 발견하고 생명의 의미를 찾았듯이
, 쉽게 절망하지 말고 살길을 찾아보고 희망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너도나도 모두가 무서움에 떨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날도 지나가게 되어있다. “강에 닿기 전에, 다리 걱정하지 마라는 속담과 오늘의 걱정은 오늘로 족하다는 성경 말씀은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 너무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 말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견디다 보면 희망하는 좋은 날이 꼭 올 것이다. 절망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택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기를 기도한다. 살아갈 희망의 끈만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 기다리자.


질병도 절망도 다 지나간다
. 지금 생명의 봄이 분명히 오고 있다. 시멘트 옥상에도 민들레가 필 것이다. 잘 자라고 있는 무청의 잎과 노란 꽃이 오늘은 유난히 더 예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