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애예술인 인터뷰, 더 괜찮은 작가가 되고 싶은 정상미
칼럼/한국장애예술인협회 klah1990@daum.net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4-05-07 14:33:55


희곡작가 정상미. 정상미

 

 

연극인을 꿈꾸며

 

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했던 정상미 그녀는 학업보다 연극동아리 활동에 더 집중하며 연극에 푹 빠져 뜨거운 4년을 보냈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는 것보 다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했고, 무대를 보면 설레는 자신에게 연극만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졸업 후 생계를 위한 밥벌이를 하면서도 아마추어 극단 배우로 병원이나 교도소 등으로 위문공연도 가고, 연출도 하고, 희곡도 쓰면서 연극을 놓지 않으려 때론 힘들어도 행복한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주변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지적과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좀.”, “웃을 때 왜 눈은 안 웃고 입만 웃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혹시 어렸을 때 소아마비였어요?”, “예전에 교통사고 당한 적 있어요?” 등등반복되는 그런 소리에 비로소 자신의 몸이 남과 다름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불안이 무섭게 몰려 들어왔다.

 

병원, 한의원, 자연치료 등 안 해 본 치료가 없었지만 몸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예전에 되던 움직임이 하나둘 씩 안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장애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은 2006 년 여름,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 뺨이 빵빵할 만큼 바람을 가득 머금고 입술을 앙다물지 못했고, 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없었다. 엄마는 엉덩이를 쭉 빼고 걷는 습관을 고치라고 했지만 그런 자세가 아니면 걷기가 힘들었다.

 

어릴 적 꿈이 임춘애를 닮은 육상선수였고,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운동회에서는 청군 대표 선수로 뽑힐 정도로 달리기를 잘했으나, 점점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침내 중학교 3학년 때는 마음과 달리 빨리 달리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마음은 어릴 때처럼 100미터 15초였으나 실제로는 50초가 넘었다. 그뿐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였다. 몸이 마음의 속도에 한참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계단도 잘 오르내리고 등산도 즐겼지만 자주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바지에 구멍이 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정형외과에 갔고, 각종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병명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을 전전하다가 2006년 신촌세브란스 신경과에서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그녀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안면견갑상완형의 근이양증이라고 바로 진단했다. 그래서 눈이 꼭 감기지 않고, 표정을 짓는 얼굴 근육이 약한 것과 걸음걸이가 이상한 이유 등을 다 설명해 주었다. 이미 나타난 증상을 다시 확인하며 듣는 것도 괴로웠으나 그보다 더 무섭고 절망스러운 것은 이 근육병이 진행성이라 장애가 점점 심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장애인이 된 후

 

마침내 중증지체장애인이 되었고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연극배우의 꿈을 더 이상 꿀 수없게 됐다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상실감과 우울감에 빠졌다.

 

지금이야 여러 장애인극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당시 그녀는 그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던 배우로부터 연극 접어!’ 라는 충고를 듣고 약 없이는 버티기 힘든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가족마저도 자신이 겪고 있는 상실을 공감해 주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잠 속에 빠져 잠시 잊을 뿐 눈을 뜨면 지옥이었다. 그렇게 20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20대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죽든 살든 일단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이 현실에서 일단 벗어나고 싶어 동생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학연수를 가장한 현실도피였다.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던 동생은 당시 욘사마열풍으로 한국어 강의의 수요가 늘어 언니 하나 건사할 만큼의 수입을 벌고 있었다. 첫 번째 구원의 손길이었다. 대학 부속 일본어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대학의 연극 강의를 수강하였다. 첫수업 날, 교수 이름이 한국인 이름이라서 수업 후 부러 인사를 하러 갔다.

 

그는 한국말은 못하지만 제일교포 2세로 대학교 수이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극단의 조명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 일본에서의 연극활동에 관한 상담을 청했고, 극단 분가쿠쟈(文學座) 연출부 입소 시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 출제 경향과 관련 자료들을 받아 일본어 공부와 입단 시험공 부를 병행한 끝에 간신히 합격했다. 당시 극단 창립 70년 만에 첫 해외 연수생이 된것이다. 두 번째 구원의 손길인 셈이다.

 

본과 1년을 마치고 약 71의 경쟁률을 뚫고 2년간의 연수과에 진급하게 되면서 일본 연극 현장의 한가운데서 연극을 제대로 배우며 3년 차에 작·연출로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극단 내 최초 한국인 이름이 등장하는 한국작품 번역극이 공연이자 연수생 공연으로는 드물게 만석에 재관람 관객까지 생길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극단 내 활동뿐 아니라 외부 활동으로 일본 연극 중 한국어가 나오는 공연의 한국어 지도와 2009년 제1회 한일 교류 연극페스티벌에서 통역 스태프를 맡아 한일 연극인 사이에서 가교 역할에 일조하며 한국 연극인들과의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만난 한국 연극계의 대부인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도 이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좀처럼 맺기 힘든 인연을 일본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훗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분의 조연출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희곡작가로 등단

 

20113, 일본 동북부의 대지진을 겪고 4월에 귀국하여 극단 산울림의 연출부 스태프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며, 국립극단에서 주최하는 젊은 작가·연출가 워크숍에 합격하여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연극인들을 두루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2011년 신춘문예에 도전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조금씩 습작한 작품을 응모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첫 도전이고 글쓰기에 자신도 확신도 없던 터라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심사평 마지막 줄에 그녀의 이름, 작품명과 함께 최종적으로 논의되었지만 단막극이 아닌 장막극에 가까워 응모 규정에 맞지 않았다.’는 문장 한 줄에 당선된 것 이상으로 기뻤다. 자신도 노력하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습작 시절 처음 쓴 단막희곡을 다듬어 같은 신문사에 재도전을 했고, 마침내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그들의 약속>이 당선됐다.

 

그녀는 희곡을 쓸 때 신이 난다. 캐릭터가 대사로 생생히 살아나는 매력 때문이다. 극 중 인물이 활자에 머물지 않고 대사와 지문으로 생생하게 부활하기 때문이다. 힘든 자료조사와 플롯을 세워 마침내 첫 대사를 쓸 때 자기도 모르게 톡 튀어나온 언어 구슬이 줄줄이 꿰어져 가는 글쓰기가 즐겁다.

 

희곡 극작뿐 아니라 서울YWCA를 비롯한 여러 소식지의 에세이도 기고하고 있으며, 특히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일본 현대희곡을 번역, 공연하며 현재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운영위원으로서 양국 간의 연극 교류에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312~17일에 그녀의 등단작 <그들의 약속>이 재공연되었으며, 322~24일에는 명동예술극장에서 한일연극교류협의회 낭독극 <조지 오웰-침묵의 목소리>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스즈키 아쓰토 작으로 정상미가 번역한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대학 시절 한 소설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포털 카페에서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을 만났다. 처음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밍기뉴가 쓴 글이 유독 눈에 들어왔고, 각자 올린 글에 서로 리플을 달면서 친해졌고, 첫 정기모임에서 그를 본 순간 그가 밍기뉴임을 직감하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렇게 반년을 짝사랑하다가 4학년 늦가을에 소주 네 병의 힘을 빌어 고백하고 사귀기 시작했다.

 

밍기뉴는 그녀의 비장애인 시절, 배우를 꿈꾸며 춤추고 연기하던 모습을 시작으로 근육병장애가 점점 심화되어 가는 지금까지 모든 과정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연인이자 전우다. 어떻 게든 그녀의 병을 낫게 하고픈 마음에 20대 때 침구사 자격증까지 획득하여 매일같이 그녀의 집에 들러 뜸을 떠 주며 그녀의 몸의 상태와 변화를 살뜰히 살폈다. 지금도 그는 그녀의 손만 잡고 걸어도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떤지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린다.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2년 동안 본가에 가지 않았을 만큼 결혼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녀를 받아 주신 시부모는 현재 누구보다 큰 사랑으로 며느리를 아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의 가장 큰 불효가 자신과의 결혼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분명 남편 밍기뉴도 정상미로부터 받는 사랑과 안정이 큰 힘이 될 터이다. 그렇게 짝이 맞는 두 사람이기에 우연 같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들이 사귄 지 정확히 13년이 되는 날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앞으로 그들은 1115일을 처음 사귀기 시작한 날로 기억할까, 아니면 결혼한 날로 기억할까.

 

물론 마냥 행복한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3년 차에 그들에게 생각지 못한 생명이 찾아왔다. 임신은 축복인 동시에 도박이었다. 유전 확률 50%의 출산으로 근육병 진행이 빨라질 수 있고, 어쩌면 산모보다 태아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등 모든 가능성을 일본의 신경과 의사가 병원 코디네이터를 통해 말해 주었다. 한마디로 산모와 아기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 였다. 그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혈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유산했다. 그들은 여전히 그일에 대해선 서로 매우 말을 아낀다. 하루에도 몇백 번씩 마음을 바꾸어 가면서 고민을 하던 중에 유산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더 괜찮은 작가가 되고 싶다

 

희곡을 완성해도 무대에서 공연되기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대본이 선정되기도 힘들지만, 선정되어도 중간에 엎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간혹 재정이 열악한 단체에서 원고료를 받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기획 단계에서 대사를 작가 의도와 맞지 않게 바꾸려는 관계자들과의 갈등은 항상 넘어야 할 험준한 산과도 같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이루어내는 공연 한 편에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극장 안에서 울고 웃으며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관객들을 보며 가슴 뜨거운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그녀가 힘든 가운 데서도 끝내 연극을 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극작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가장 큰 사건은 바로 개그맨 출신 재즈가수 이동우와의 만남이다. 90년대 인기그룹 틴틴파이브의 멤버였던 이동우는 2009년 망막색소변성증이 라는 희귀질환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2013~2014년에 슈퍼맨 프로젝트로 변화를 시도 했다. 철인3종경기, 재즈가수 데뷔와 더불어 마지막엔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는 프로젝트였는데, 세 번째 연극무대의 대본을 그녀가 맡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도장애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빨랐고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이동우는 매니저가 읽어 준 대본을 수십 수백 번을 듣고 외우며 연습에도 적극적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더 괜찮은 작가가 되고 싶은 의지와 함께 언제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정극 대본을 쓸 꿈을 갖게 되었다.

 

노인극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코로나19의 약 3년 동안 모든 것이 멈춰진 듯하였지만 그녀의 근육은 쉼 없이 위축되어 눈에 띄게 장애가 진행되었다. 2018년도까지만 해도 혼자 대학로에 가서 계단 많은 지하소극장 에서의 연극도 보고, 극단 사람들과 미팅 등의 자리도 종종 가졌으나 지금은 지팡이 쥘 손의 힘도 떨어져서 옆 사람의 팔을 잡고 걸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서의 외출이 급격히 줄고 누군가와의 동행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부축하며 걷던 지인이 천천히 걸으니까 안 보이던 풍경이 보인다.” 고 했다. 그 말에 그녀는 걸음이 느리다는 것은 속도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놓치는 세상 곳곳의 그늘진 곳을 더 잘 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을 전환하게 되었다.

 

작가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속도의 문제보다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살아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더중요한 문제일 테니, 어쩌면 그녀의 느린 걸음은 작가로 서의 특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근육병 장애는 남들보다 다소 일찍 찾아온 노화라고 생각한다. 늙지 않는 사람이 없고 초고령사회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그녀는 먼저 경험하고 있는 노인의 몸으로 현대인의 삶을 희곡으로 옮긴 노인극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힘없고 소외받는 (노인을 포함한) 누군가가 그녀의 연극을 통해 잠시라도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더 큰 기쁨도 영광도 없다고,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앞날을 기대한다.

 

정상미

 

희곡창작 및 번역가(일본어한국어)

현 한국극작가협회 정회원

현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운영위원

출판: 희곡 단행본 낙원상가(평민사), 제발, 결혼, 안녕, 내일(자큰북스) 발간

수상: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20년 대한민국연극제 경기도대회 희곡상

 

주요 활동 2008~2011 일본 극단 분가쿠쟈(文學座) 연출부 2014 이동우 주연 <내 마음의 슈퍼맨>(충무아트홀 소극장블루) 2016 <일그러진 풍경>(베쓰야쿠 미노루 작, 정상미 번역,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혜화당), <우리, 제발!>(극작, 예술공간 혜화), <코끼리>(베쓰야쿠 미노루 작, 정상미 번역,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2017~ 2018 군포중앙도서관 상주작가(낭독극 체홉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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