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종복 수필집, 아름다운 반칙] 머리 이야기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4-02-06 13:45:02


김종복 수필가

부산 출생

전 강원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

2013월간 수필문학’ <도보여행><고양이 일기>로 등단

전 춘천수필문학회 회장,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강원수필문학회,
강원문인협회, 춘천문인협회에서 동인활동

 

 

머리 이야기

 

까마득한 중학교 2학년 봄날. 수업 시작종이 울린 지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다. 주번인 내가 복도를 내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떴다!” 소란스러운 교실을 조용하게 하려는 우리의 암호였다. “누구야! 떴다고 한 놈이!” 교단에 서신 선생님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정적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들었다. 나는 평소 나대던 놈은 아니었다. 선생님도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끼리 쓰는 은어였지만 보름달이 떴다라는 약어로 어림짐작하셨던 모양이었다그 선생님은 보름달 같은 대머리였다.


방과 후 교무실에 가서 출석부를 정리했다
. 담임선생님이 정리된 출석부를 보고 칭찬하며, 출석부 정리 잘하면 앞으로 선생님 된다고 했다. 당시 장래의 꿈은 아니었지만 나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다. 새내기 교사인 나는 겁이 없었다. 당시 장발이 유행이었고 선생님들 대부분이 상당히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나도 그랬다. 벗겨진 대머리를 놀리듯 교무부장에게 물었다. “교무부장님은 원래 머리숱이 없었나요?” 그때 그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급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오리엔테이션 시간이 있었다
.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잘 외우기 위해 상호 연관된 캐릭터를 수첩에 기록하는데, 한 학생이 머리숱이 없어서 수첩에 bald이라고 써놓았다. 학생들은 담임선생님의 교무수첩에 관심이 많았다. 우연히 교탁에 두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그 단어를 보았다. 사전을 찾아본 학생은 얼굴을 붉히면서 따지러 왔다. 왜 제가 대머리예요? 당황스러운 나는 ‘bald’가 아니고 용감하다는 ‘bold’. 철자가 그렇게 보인 것이다. 둘러대었지만 이미 학생의 맘은 무척 상해 있었다.


세월은 흘러 나도 어쩔 수 없이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 아버지의 대머리 유전자를 이어받지 않은 줄 알았던 내가 아버지처럼 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물었다. “선생님은 원래 머리숱이 없었나요?” “아니야. 앞머리를 입에 물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의 장발 단속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 다녀야만 했다.” 학생들이 거짓말이란 듯이 책상을 치면서 박장대소했다.


늦가을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 학생들을 인솔하여 도립문화관에 김동길 씨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책임교사였기에 학생들 맨 앞에서 인솔했다. 심한 바람에 머리가 다 헝클어졌다. 나중에 차를 타고 온 여선생들에게 빗을 좀 달라고 하니, 웃으면서 빗을 게 없는데 무슨 빗을 찾느냐며 웃었다. 그들은 농담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웃진 못했다.


그날의 강연 제목은
인생의 4계절. , 여름, 가을, 겨울.”이었다. 봄날 같은 학생들은 청춘의 봄을 잘 누리고 씨앗을 잘 뿌려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신체를 단련하라고 했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이 아주 더딘 것 같지만, 인생의 겨울 속에 와 있는 당신이 돌아보니, 세월은 쏜살같다고 했다.


나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학생들과 함께 앉지 못하고
, 강사의 연단 뒤에서 들었다. 나는 학생의 계절보다는 강사의 계절에 훨씬 더 가까움을 절감했다. 뒤에서 보니 그분도 머리숱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떴다라는 말을 들으면, 중학생 시절의 그 선생님의 대머리를 떠올린다. 헷갈리는 두 단어 baldbold를 생각하면, 속상해서 나를 찾아왔던 그 학생을 생각한다. “젊은 날에 머리숱이 많았어요?”하고 누가 물으면, 그 교무부장이 생각난다. 내 머리숱이 이럴 정도로 없어질 줄 몰랐다.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어디까지가 얼굴의 경계이지요?” 농담하는 물음에 세수할 적에 손이 닿는 부분이 경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이발하고 오시면, 깎을 머리가 어디 있다고 이발소에 다녀오느냐고 농하셨던 어머니의 말을 이제는 내 아내가 하게 되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없는 것이 과연 머리카락뿐이겠는가
? 그 무엇이든 없는 사람에게 머리숱 같은 농담은 삼가야 한다. 그에게는 농담도 진담이 될 테니까. 나는 오늘도 거울을 보고 한 올 한 올 정성껏 머리를 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