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2월 첫 날, 온곡 형님 3주기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3-02-07 11:11:10


 

2월의 첫 날, 오전 10시 반경, 최이사가 나를 태우러 수겸초당으로 왔다. 평소엔 이렇게 못 일어난다. 달샘이 깨워서 가능했다.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온 거다.

 


서면 월송리에 있는 온곡형 묘소에서 강원일보 사진부 전
, 현직이 함께 모여 3주기를 기리는데 나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전직으로 윤재호 목사, 김진영 차장, 최용주 이사가 있고, 현직으로 김남덕 부장 겸 부국장, 그리고 박승선 차장이 왔다. , 현직 다 깊은 인연이 있음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사진부와 밀접하게 지내왔다. 1974년 가을, 23회 국전에 입선하며 기사에 곁들일 사진을 당시엔 평기자였던 영택형이 찍었다. 인터뷰는 마홍목 사회부 기자가 했고 기사를 썼었다. 그러니 기사는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6단 박스 기사로 보도됐다. 기사의 크기나 사회면 보도는 파격적이었다. 이 기사를 계기로 마기자와 박기자 함께 오래 인연이 시작됐다.

 

온곡[溫谷] 박영택 국장은 사진부 평기자로 시작해 차장, 부장을 지내고 문화부장과 판매, 광고국장 등 다른 분야로 영역을 넓힌 최초의 사진부 기자였다. 형제가 없다며 나를 친동생처럼 챙겼다. 3년 전 작고 할 때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 사진 촬영을 전담해 줬고, 급한 건 사진부 암실까지 들어가 현상하는 걸 지켜보며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사진을 받아오는 일도 잦았다. 최용주 기자도 온곡형 뒤를 이어 부장, 부국장, 국장을 거쳐 이사까지 됐다. 사진부와 그렇게 50년을 맺어온 인연이다. 사진부는 늘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있어 내 집처럼 수시로 출입했다. 그 다음으로 문화부와도 당연히 엮였다. 미술 분야에 대한 문의에 대답해주고 필요한 자료도 수시로 제공하며, 내 화실이 신문사와 가까워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영택형님의 온곡 아호도 내가 작명해줬다
. 조부모, 부모 합장 묘비, 형님 묘비 글씨도 내가 썼다.

 

1월 하순의 날씨는 변덕 그 자체였다. 엄동설한에 낮엔 영상 기온으로 양지쪽 땅은 질퍽할 정도, 밤이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져 상반된 상황이 계속되고 아니면 자주 흐리다 눈 내리고 바람도 불며 불안정했었다. 끝날 31일까지 그랬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21일은 쾌청하고 봄날처럼 포근했다. 음지엔 눈들이 쌓여있어도 양지 쪽은 녹았다. 3대가 모인 묘소는 양지바른 쪽이라 눈이 없었다.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아 아늑하고 명당이다. 신문사의 다른 부서, 사회부나 정경부, 문화부 등은 타 부서로 기자들이 옮겨 다니지만 사진부는 이동이 없으니 관계가 유독 끈끈하다. 외유내강의 온곡형님이 친화력으로 통솔한 것도 작용했을 터이다. 원체 부지런하고 정리정돈이며 매사에 솔선수범형이었다. 사진부 합동 회식에도 나는 자주 동석하는 거의 유일한 외부인이기도 했다. 산막골 생활 19년이 긴 단절 시간이었지만 시내 외출하면 여전히 사진부만은 작품사진 부탁차 들렸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내 홈페이지 구 사랑방을 들여다봤는데, 거기엔 온곡형의 자취가 자주 있었다.


로마초대전 사진들도 다양하게 도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생생하고 풍성하게 올려져 있다
. 어떻게 감당을 했었는지 싶다. 로마국립동양예술박물관 별실에서 가진 십여 차례의 시연회, 사피엔자대학 대강당에서 가진 450여명이 모였던 시연회도 그랬고, 유료임에도 관람객들이 풍성했었다. 박물관 입장료 수입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최고, 최상의 대우를 받았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산막골 일기가
1027편이나 쓰여졌다. 산막골에서 머물며 로마초대전과 강원일보 초대전을 두 번이나 치뤘다. 크고 작은 규모 개인전도 몇 차례 가졌다. 내 삶의 황금기 19년을 산막골에서 지냈다. 처음부터 긴 체류를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인생의 가장 험난한 폭풍우가 산막골 생활 초반에 몰아쳤고 지옥을 경험했었다. 수많은 새 인연도 첩첩산골 산막골서 맺어졌었다. 인터넷 덕분이다. 온곡형이 새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