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새해 첫 눈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3-01-10 13:52:45


 

7일 새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오전 내내 왔다. 작년 12월에 푸짐히 왔던 만큼 쌓였다.

 


새해 들어 첫 눈이니 서설
[瑞雪]이라 할 것인가. 순백의 세상은 언제 봐도 감동을 준다.


발산초당이 있는 시골은 논
,밭이 넓게 펼쳐진 들판이라 흰 화선지로 바뀐 듯 여백이 더 많은 깨끗한 풍경이 되어 딴 세상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시정[詩情]이 온 누리를 누벼 놓은 듯 여겨진다. 눈 내림이 대충 끝나자 다닐 수 있는 통로만 대문 밖까지 최소한으로 쓸어 놨다.


차가 다니는 길들은 동네 안 길까지 금방 제설 작업이 이뤄진다
. 초당 울타리 밖이 차 다니는 안 길이어서 쓸면서 나가보니 벌써 치워져 있었다. 길이 좁아 교행은 안 되는 일방통행인데 그래도 대형 트럭까지 다닐 수 있는 폭은 된다. 초당 뒤, 좀 떨어진 곳에 발산이 조금 큰 동산처럼 있고, 앞쪽으로는 조금 멀리 낮은 산들이 포복하 듯 길게 뻗어있어 아늑함을 만든다.

 

언제부턴가 연말연시 주고받던 연하장이 사라지고, 스마트폰으로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눈다.


저절로 생긴 변화이다
. 어디 연하장 뿐이랴 편지를 육필로 써서 소통하던 것도 없어졌음이다.


폰을 이용해 시시각각 빠르게 소통이 이뤄지는데
, 오로지 최소한의 실용성 짧은 문구들만 넘나든다. 손편지를 대신한 것이 전자메일이었으나 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이젠 희소해졌다. 초기엔 그 펀리함에 감탄을 했었다. 우표값 안 들어가고 부치는 수고가 없으며 실시간으로 종이 낭비없이 긴 글도 편리하게 쓸 수 있었다. 특히 글씨가 악필인 사람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더구나 해외로 보내는 편지는 우체국까지 가야 해서 절차가 참 번거로웠다
. 해외로 거는 전화 또한 그랬다. 전화국에 가서 신청하고 기다려서 통화를 했었다. 가정마다 있던 유선 전화도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공기관들만 공적 용도로 아직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 청년 시절만 해도 산아제한을 국가가 나서서 적극 권장했었다. 아니 강요라 할 것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에 더해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까지 나왔었다.


우리집만 해도
336남매였다. 이 정도가 평균이었을 터이다. 육이오 전쟁 때 하난가 둘을 영양실조와 병으로 잃었기에 그랬다. 정관수술 등 피임을 하면 국가에서 혜택을 주기도 했었다.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아 내 생전에 인구 절벽을 맞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 이젠 출산 장려가 국가 시책이 됐다. 나라가 권해도 낳을 생각들을 안 한다. 아기들을 보기란 1년에 손꼽는다.


지방 농촌엔 빈 집들이 늘어난다
. 지방 도시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나온다.


서울과 성남 등 그 가까운 도시만 아직도 미어터지는 중이다
. ,부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내 나라도 선진국에 진입했다. 꿈만 같은 일이다.

 

세상 구석구석 참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래도 적응들을 잘 한다. 놀라울 정도이다. 어리버리 내가 따라가는 게 신통할 지경이다. 가장 뒤쳐져 있을 터이다. 내 작업이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에 맞춰 나아가는 길이라 그런 점도 작용을 할 테다. 앞서가고 싶은 건 과욕이겠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화필을 잡은 이래 50여 년간 꾸준히 작품을 해왔다.


뒤돌아보니 아쉬움이 많다
. 미친 듯이 덤벼들어 몰입할 환경이 아니었다. 주어진 현실을 외면 못하는 성향 탓도 있겠다. 내 삶에 안정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능력도 못가졌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이라 현실을 감당하기 힘겨웠다. 꾸준함과 성실만으로 버텨온 편이다. 중국 장춘에서 시연회,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자대학 대강당에서 시연회는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평생 남 앞에 나서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던 성향도 소용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잘 해냈으니 대견하달까.

 

계묘년 새해에는 또 어떤 일들로 채워질 것인가. 계획된 건 남옥선생 매화시를 화폭에 담아 전시회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여하고 있는 각종 단체전에 출품을 할 터이다. 노숙함은 바라지 않고 완숙의 단계로 가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직은 멀고도 먼 도정으로 보인다. 어쩌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