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동지[冬至]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12-27 12:00:53


 

1222일 오늘이 동지날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 동지 이후부터는 아주 조금씩 다시 낮의 길이가 늘어나는 변화도 생기게 된다. 20일엔 대설주의보까지 발령되고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푸짐하게 왔지만 폭설까지는 아니다. 은세계가 볼만했다. 강한 바람과 한파까지 동반해서 가장 겨울다운 추위도 겪었다. 요즈음에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오늘도 오후 3시 반이 넘어서야 일어났다. 그러니 평소에도 좋아하지만 먹기 어려운 팥죽을 절에 가서 먹기에 애매했다. 가까이 있는 절도 없다. 작년엔 점심 무렵 삼운사에 가서 해결했었다. 알던 모르던 어느 절에 가든 팥죽은 묻지 않고 주는 편이다. 대체로 소양로에 있는 석왕사 신세를 많이 졌었다. 한 동네에 있던 절이고 어머니가 신자인 데다 주지스님도 잘 안다. 석왕사 불교대학을 1, 2기나 다니기도 했던 인연까지 있어서다. 맹추위 동지 날 추우면 풍년이 든다는 데 위안을 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12월 들어서 느껴지는 것은 1년이 지나는 게 순식간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나이를 더할수록 세월이 빨리 간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젊은 시절엔 몰랐었다. 올해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내 화필 생애에 산수화를 가장 안 그린 1년이기도 했다. 매화를 집중해 쳐가며 내 개성이 담긴 우안매를 시도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보여진다. 어떤 변화가 있기는 하다. 미치도록 빠져보고 싶지만 천성이 그런 건지 평생 치열해보지 못했다. 한 눈 안 팔고 그냥 꾸준했을 뿐이다. 책 보고 붓 잡는 것 말고는 취미도 없었다. 사람 만나는 건 좋아했다. 때마다 좋은 분들을 만나며 내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아리랑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민일교수는 다방면에 박식했고 내 가정교사 역할을 해줬다. 당시는 사사건건 참견해 꼭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 같아 싫고 미울 때도 있었는데 돌아보니 가장 훌륭한 가정교사였다. 소심한 초졸의 청력장애를 가진 촌놈이 감히 내색도 못하며 받아들였다. 나를 아끼는 마음은 지극했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화실에 출근하듯 매일 들렸고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러니 내 일거수일투족을 환히 꿰뚫고 있어 자청해 지도 감독을 한 것이다. 하는 것마다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하며 답답하게 보였으랴. 군에 입대해선 부대장을 보좌하고 교육계에선 도 교육감을 수행하며, 한 때는 강원일보 기자생활도 했었고 내가 공부하던 시절엔 소헌 선생님 친구로 이때부터 화실에 매일 들렸고, 내가 물려받은 화실에도 이어진 격이 됐다. 예맥고미술회 핵심 맴버에 춘천수석회도 중추 역할을 했고 그러니 수석과 분재도 전문가 수준, 서화, 골동에도 누구나 인정하는 안목을 가졌다. 국문학 전공이라 전시회 때 팜플렛에 들어갈 글들은 초기엔 전담해 주었고 차차 내게 시키며 감수를 해줬다. 사사건건 내 병풍 역할을 자청해 해줬다. 덕분에 춘천 사회의 여러 분야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교유의 폭을 넓혀 가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될성 싶은 떡잎이라 보고 작심해서 팔 걷어붙이고 나선 셈이라 파악된다. 당시엔 느끼지 못했었다. 문득 돌아보니 그렇다.

 

국전 입선부터 백양회공모전, 강원도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에 계속 인정을 받으니 박교수도 기대가 컸을 터이다. 참견이 지니치다 싶고 너무 심해서 한번은 다방으로 모셔 내 심정을 토로하니 본인도 인정을 하며 그후부터 눈에 띄게 한발 물러서고 자제를 해줬다. 작고할 때까지 내겐 그림 외에 세상살이 삶 전반에 가장 큰 스승이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생명사상에 눈뜨는 계기가 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감화를 살아오며 처음으로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박해조 선생을 만나며 또 다른 삶의 지혜를 접했다. 신선했고 감동이었다. 잔잔한 숨결의 소중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은 목영진선생을 만남으로 시작해 소헌 박건서 화백과 남천 송수남 화백한테 본격적인 사사를 받았으니 스승 복이 참으로 많았구나 싶어진다.


나란 사람이 그냥 저절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다
. 독서를 통해서도 많이 배우지만 직접 만난 스승에게 받는 영향력은 비교가 안 된다. 이분들께 받은 게 많은 나는 과연 나는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왔는가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