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흰지팡이 날 기념 수기 당선작] 흰지팡이와 함께 하는 인생여행 길
<최우수> 황태현(시각장애인연합회 원주지회)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11-08 16: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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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흰지팡이와 함께 하는 인생여행 길

 


황태현
(시각장애인연합회 원주지회)

 

오늘도 가방에 케인을 먼저 넣고 어깨에 멘다. 어느덧 시각장애인이 된 지 25년이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직업재활, 점자촉지훈련에 보행을 열심히 하였다면 두 번째는 컴퓨터 취미생활을 하려 서울에서 지냈던 단기숙소시설 생활이고 세 번째 박건돈 님을 만나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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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한글점자를 한 달 코스로 점형만 익히고 학교 중3 과정 청강생으로 몇 개월 지내고 그 이듬해에 고1 과정을 했다. 처음엔 대학에 가려 노력했으나 점자가 느려 진학은 포기하고 점자 촉지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학교와 식사 장소인 맹아원 가는 코스를 익혀야 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코스는 점자를 나보다 몇 달 먼저 익힌 12살 많은 약시인 형에게 코스를 배웠고, 오는 코스는 온 길을 되새기며 보행을 익혔다. 저녁 시간에는 약시인 형이 없기에 혼자서 케인에 의지해 코스를 3년 내 반복해야 했다.


나는 아토피가 있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취직을 하지 못해서 집에서 지내야 했다
. 학교에서 점자를 가르쳐 주신선생님께서 도스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로 취미생활을 즐기던 200212월 어느 날. 서울 역삼동 종교단체에서 윈도우 운영체제를 이브라는 스크린 리더를 통해 배워야 했다. 단기숙소시설에서 배우는 장소까지 10분이 걸렸는데 선생님 보행하는 소리를 듣고 나도 따라가며 한 달을 보냈다. 그 단기숙소시설 공간에서 문 앞에 다 왔다 문이 열려 있는 줄 모르고 이마를 찧는 경우도 많았다.


그 다음 해 상일동에서 드림보이스로 윈도우 운영체제를 서울맹학교 재활 학우들과 배우고 거기서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추억을 남겼다
. 17년 즈음인가 한국시각장애인노인복지협회에서 박건돈 님을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 분은 다른 분에 비해 케인을 일상생활화하셨고, 가까운 15분 되는 거리를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셨다. 돌아보면 나는 케인이 생활화되지 않았고, 활동보조 서비스가 생기면서 활동 지원사에 의지하거나, 약시친구들에게 의지해서 많이 다녔는데 그분은 일상화하셨다.


19
년에 횡성에서 경로당파견사업으로 같이 일했다. 횡성에서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도 박건돈 님을 보아라 요즘 흰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운전사나 보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는, 인식개선이 되었기에 박건돈 님처럼 흰지팡이를 꺼내라 당부하신다. 13년에 원주지회에서 보행을 배웠을 때 보행지도사 선생님께서는 활동보조 서비스가 생기면서 케인을 활용하라 했는지 생활화하지 말라했는지 생각이 안나, 횡성 선생님에게는 선생님이 있기에 안 꺼내도 무방하다라고 자기방어에 일색했다.


나는 한쪽 다리가
2cm 짧은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나는 13년부터 계속해서 횡성지회 사무실로 원주에서 횡성까지 출퇴근을 하고 있다. 13년에서 코로나 19가 오기 전까지는 횡성심부름센터 차량을 이용하며 출퇴근을 했다. 그런데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급여의 70%만 받게 되고 심부름센터 차량의 관외 지역 운행이 제한되면서 다시 케인을 꺼내야만 했다. 2110월에 다시 횡성지회장님이 지회 사무실 내에 안마서비스센터가 개설되면서 사회적 거리 규정을 준수하면서 오전, 오후반 2팀으로 나누어 일을 재개했다. 오전에는 일찍 원주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곤 했지만, 오후 근무 체계로만 바뀌면서 케인을 다시 펼수 밖에 없었다. 오전 시간 버스 출발 시각을 파악해야 했으며, 매번 장애인교통약자 차량의 임차 택시 표도 끊어 주고, 버스 들어오는 입구 의자에 앉아 주시는 기사님들의 수고 덕분에 출퇴근을 했다.


어느 날 원주 선생님께서 바쁘셔서 표도 끊어 주고 입구 의자에 앉혀 주시고 가셨다
. 버스 출발 시간이 되어 보행을 하는 데 앞의 할머니 분의 발이 케인에 걸리기에 이 차 횡성 가는 것이 맞냐고 질문하니 할머니께서 맞다고 하신다. 무의식 중에 탄 나는 평소에 보다 횡성 가시는 분들이 많다 머리에 생각하고 아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원주지회에서 점자를 지도하기에 교육계획을 머리에 집중하던 차에 횡성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내릴 시간이 되었는데 자냐고, 나는 무의식에 30분 안 된 거 아니냐고 횡성 선생님은 주변 분에게 물어 보라고 내가 옆에 20대 여성분에게 물었더니 이거 여주 가는 거라고...


맞다
. 내가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 말씀만 듣고 탄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주와 횡성 가는 것은 5분 차이고 버스가 횡성 차량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여주터미널에서 내려 횡성 선생님께 와 달라 부탁드리고 버스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때만큼 케인에 의지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원주 선생님께서 나를 측은하게 느껴 장애인교통약자차량이 갈 수 있는 최대거리를 묘수로 내주시어 원주시 소초면 장양리에 있는 치악산약국에서 횡성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고 그 후 손에서 케인을 놓지 않는다.


아직도 마음이 소심하여 나도 혼자 다닐 때는 케인을 일상화하지만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있으면 그분께 의지를 많이 한다
. 앞으로는 선생님이 있든 없든 케인을 일상화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결실을 맺어 21년부터 원주지회 점자 강사로 2004년부터 컴퓨터 방문 강사를 겸하고 있다.


케인을 생활화하는 용기가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 박건돈 님에게 오늘도 말한다. 내가 45인승 리무진 차량을 대절하고 왔다하면 케인을 생활화했다는 사인으로 들으신다. 항상 옆에서 보필해 주시는 원주, 횡성 활동지원사 선생님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한 마음 전해본다. 그리고 25년 전의 초심을 다시 먹게 해 준 박건돈 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