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낸 에세이] 열매 맺는 복

지소현 승인 2022-09-20 10:50:43


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전지전능한 보호자였다. 남다른 자식 사랑으로 성장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든든한 아버지에게 물질보다 더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 회갑
, 음력 719, 그러니까 양력 8월 말경이었다. 어머니와 작은어머니는 며칠을 거쳐서 술을 빚고 떡방아를 찧고 돼지를 잡고, 동네잔치를 준비했었다. 가난한 산골 동네 사람들도 덩달아 그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며칠 동안 늦은 장맛비가 쏟아졌다.


회갑 날은 그칠 거야.” 잠까지 주무시지 못하는 어머니의 희망 사항이었다. 나도 전설 속 효녀처럼 열렬히 비가 그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하늘까지 다다르지 못했는지 빗줄기는 강약을 반복하며 멈추지 않았다.


집 앞 논둑 밑의 개울에는 황토색 거센 물이 벼락처럼 흘러갔다
. 뒤척이는 물살 위에는 나뭇등걸이 빙빙 돌고 바위가 천둥소리를 내며 굴렀다. 막 이삭이 패기 시작한 벼들은 일제히 비스듬히 누워 몸살을 앓았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내일이면 회갑 날인데, 라디오 뉴스 일기예보에 귀 기울였다. 비가 오다 그치다가를 반복한다고 했다.


회갑 날 이른 아침
, 언니가 다급하게 흔들어 깨웠다. “물난리가 났어. 피신해야 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장 소중한 재산인 책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보자기를 덮어쓴 채 마당을 나섰다. 드디어 둑을 넘어 집 앞 논으로 흘러드는 벌건 물이 보였다.


언덕 위 영화네 집으로 가야 해.” 지대가 높은 뒷밭 두렁을 지나 피신처로 향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와 큰오빠는 삽을 들고 물길과 싸움을 벌였다. 봇도랑을 파고 가마니에 돌을 넣어 쌓는 일에 사투를 벌였다. 겨우 영화네 집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도착한 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마당에 물이 들이닥치고 있어.” 남은 가족들이 뒤란과 맞닿은 언덕으로 피신했다고 했다. 넋을 놓은 채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침과 점심 식사를 굶은 것이 생각났다
. 일생에 한 번뿐인 회갑 날 아침, 미역국도 드시지 못한 아버지와 음식 준비로 며칠을 보낸 어머니의 헛수고가 가슴 아팠다. 착하신 부모님께 저주를 내리는 하늘을 원망했다.


오후에 들어서자 서서히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하고
, 먹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얼굴을 내밀었다. 짐을 다시 들고 집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왔으면 집도 떠내려갈 뻔했네.”마당에 질펀하게 깔린 진흙을 밟으며 봉당에 올라서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곳간에 들어갔다 오시더니 말했다
. “떡과 부침개, 고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수박이 시렁에 얹혀 있네.” 새언니가 눅눅한 부엌에서 국수를 끓여 내왔다.


아버지는 날벼락을 맞았어도 듬직한 표정을 유지했다
.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을 안방에 모셔놓고 제각기 큰절을 올렸다. 감사, 안타까움, 건강 기원 등등 오만 감정을 담아서다. 큰절 하나로 마무리한 아버지의 회갑 잔치였다.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따듯한 말을 전했다.


절절한 쓰라림은 들판에서 나타났다
. 물벼락을 맞은 벼 이삭이 하얗게 말라버렸다. 너른 들판 그 어디에서도 쌀 한 줌을 거둬들이지 못했다. 봄 내내, 여름 내내 애지중지 가꾸던 벼들이 아니었던가. 논둑에서 주무시면서까지 논물을 본 아버지 정성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발자국이었다.


그해 가을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 놓고 담담히 말씀했다
.


열매는 하늘이 맺게 하는 거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해. 살아보니 복 중의 복은 끝날에 열매를 맺는 것이더라. 너희들 일생도 마지막이 좋기를 바란다. 하늘의 복을 받도록 선하게 서로 도우며 살아라.”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복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그 말은 나의 신앙생활 지침이 되었다. 당시 교회 근처도 가보지 못한 아버지였건만 진솔한 가르침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