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낸 에세이] 탁월한 축복

지소현 승인 2022-09-14 12:25:53


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나는 아픔을 동반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 유년 시절 동네 사내아이들의 놀림이었다. 떼 지어 놀다가 내가 지나가면 절뚝발이 절뚝발이 따라오면서 합창했고 걷는 흉내까지 내면서 낄낄거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차올랐지만 어쩌겠는가, 달려가 잡을 수도 없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견디었고, 수치감과 좌절감이 쌓여갔다. 아마도 마음 상태를 투시할 수 있는 도구가 있어서 그것으로 본다면 내 가슴은 새까만 거름더미일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조롱감이 될까 봐 태연함을 가장하고 살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같은 폭력은 보이지 않게 벌어졌다
. 열심히 일해도 세상은 나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부터 보는 것 같았다. 가깝게는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도 벌어졌다. 결혼과 함께 세 명의 손아래 시누이들이 생겼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나를 구제라도 해준 듯이 생색을 냈다. “우리 집 같은 집이 어디 있어막장드라마가 따로 없는 시집살이였다. 다행히도 16년 만에 막을 내렸고 이는 신이 내게 준 탈출구였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은근한 린치를 당했었다
. 단체 활동을 함께하는 멤버가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그는 정기적인 모임 때 항상 내 차 신세를 졌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횟수가 거듭되자 당연한 승차 권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기가 아니라도 나는 차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냥 빈자리 하나를 얻어 앉았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더욱 고약한 기분은 같은 목적을 가진 장소에 도착하면 나를 저만치 떨어뜨리고 자기 혼자 뛰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동행했는데 저는 먼저 달려가는 가다니. 무슨 사소한 배신이란 말인가.


전업주부였을 때는 이웃 간에도 벌어졌다
. 비슷한 또래 동네 아낙네가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통 있을 법한 다툼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집 잘못이었고 나는 그것을 지적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경우에 밀리자 병신이 갖은 지랄한다더니조롱하는 것이었다. 우발적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기묘한 가해는 일상에서도 숱하게 있었다. 너는 신체적 핸디캡이 있으니 혼자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메시지, 사람들 시선이 슬쩍 내 다리를 훑는 일, 기본이 되먹지 못한 남성 지인이 팔을 뻗어 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가는 일 등등... 시쳇말로 만만한 비지떡이었다.

 

사람도 동물인지라 자기보다 약해 보이면 본능적으로 무시한다. 백인은 흑인을, 남자는 여자를, 도시 사람은 촌사람을,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선진국은 후진국을. 부인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사실 앞에 과연 인간의 존엄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이는 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의식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있어야만 가능하다. 물질의 발달과 함께 인간성 향상도 있어야 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아무리 다 함께 행복하자고 구호를 외쳐도 온전한 합의점에 이르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피딱지 맺힌 상처를 헤집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멀리서 보면 희미하고 자세히 보면 얼룩덜룩 아름답지 못한 흔적들.

 

그런데 50대 중반에 이르러 기적이 일어났다. 영원할 것 같은 상처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치유의 근원은 종교였다. 누구나 원하면 다양한 신앙 행위로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나의 경우는 특별했다. 강력한 믿음의 멘토를 만나고부터 성경이 읽어지고, 기도 시간이 길어지고, 상처를 부끄럼 없이 쏟아 놓기에 이르렀다. 몇 년이 지난 뒤 나를 보니 넉넉한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지난 기억을 떠올려도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회복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믿는 천국은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이 땅에 사는 동안 마음속에도 실존하는 것이었다. 그 깨달음을 준 장애라는 체험! 어떤 의미에서는 나만이 누린 탁월한 축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