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낸 에세이] 시장 사람들

지소현 승인 2022-09-06 11:58:43

 

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저는 재래시장을 좋아합니다. 시끌벅적한 풍경이 추억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푸성귀를 담불담불 앞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빛이 살아 있고, 어묵과 순대를 파는 포장마차 여인의 넉넉한 인심이 활기를 더하고, 운동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단돈 만 원을 외치는 남정네의 호객행위도 재미있습니다. 대본 없는 시트콤처럼 유쾌하지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 여행용 가방을 사려고 시장에 갔었지요.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사는 것이 어울리는 물건이지만 전통시장 가방 파는 집을 선택했습니다. 근처 노점에서 양말, 모자도 싼값에 고를 수 있으니까요.


가방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 할아버지가 주인이었습니다. 최신 디자인 핸드백들이 할아버지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젊은 주인들은 어디 가셨나요?” 제가 묻자 내가 주인이요. 이 나이 먹도록 여기서 가방을 팔았지요.” 재래시장이니까 한 자리에서 늙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문득 고향에서 땅을 지키는 농부 생각을 했습니다. 젊은 판매원들이 일하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또 다른 사람 냄새가 아닌지요.

즐비한 가방들 무더기 속에서 자주색 여행 가방을 골랐습니다. 캐리어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래시장답게 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었더니 할아버지가 당황하시는 거였습니다
. 투박한 손으로 단말기에 카드를 끼웠습니다. 숫자판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작동하는 기색이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단말기 옆 메모지를 한참 들여다보더군요. 아마도 사용설명서인 것 같았어요. 잠시 후 카드를 뺐다가 다시 끼우고 숫자를 누르시자 전표가 출력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동그라미 하나가 더 있었지요. 깜짝 놀라서 수정을 요청하자 할아버지는 쩔쩔맸습니다. 취소 버튼을 누르고 다시 결제를 진행하는, 일련의 순서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졸지에 거액의 가방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지라 저도 당황해서 가슴이 뛰었지요. “잠깐만 기다리세요할아버지가 몇 미터 앞 액세서리 좌판 여주인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젊은 여주인이 달려와 결제를 정상적으로 처리해 주었습니다
.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단말기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카드삽입, 금액 누르기, 전표출력, 할부 개월 수, 승인 전표 출력, 그 장면이 부녀지간처럼 따듯해 보였습니다. 나는 감동의 대가로 여주인 좌판에서 마스크 목걸이를 팔아 주었었습니다.


재래시장에도 현대화 바람은 스며들었습니다
. 현금 대신 카드를 사용이 일반적이라 할아버지가 난감해하신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물건값, 거스름돈을 암산으로 척척 했을 것이고 복잡한 것은 주판알을 튕겨서 해결했겠지요. 카드단말기와 재래시장 할아버지, 그리고 좌판대 액세서리 여주인을 보면서 시골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농부가 연로한 어르신들의 밭을 기계로 갈아주던 장면을요.

 

재래시장은 또 다른 마음의 고향입니다. 농경 국가 시절,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지요. 조그만 읍내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저는, 이름이 두 개였던 친구들이 많았지요. “신발 가게집 딸, 경북상회집 딸, 포목점집 딸, 콩나물집 딸, 충북상회집 딸...” 시장 골목에 나란히 붙어있던 그들의 집이 생각납니다. 그의 부모님들은 장터에서 땀을 흘려 자식들을 공부시켰지요. 그들이 자라서 풍성한 나라가 되자 재래시장이 제일 먼저 뒷전으로 밀려버렸습니다. 그 옛날처럼 붐비고 생동감 넘치고, 사람 냄새가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 산천처럼 영원히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