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금인 시간이 넉넉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는 역발상을 한 적 있다. 100미터 경주하듯 하루를 보낼 때 보다는, 느릿느릿 보낼 때 차오르는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재활병원에서 생활할 때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걸까” 24시간을 쪼개 놓고 그 간격에 맞춰 움직이던 일상, 그것에서 벗어났음이 낯설었다. 꽉 죄는 속옷을 벗었을 때처럼 홀가분하기도 했다.
놀아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언제든지 고개를 돌리면 수다를 떨 대상이 있다는 것, 문서가 틀리지나 않았나 신경 쓸 일이 없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살펴야 하는 인간관계를 벗어 난 것... 넉넉한 환경이 내 몫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섯 사람이 기거하는 병실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렀다. 재활병원의 특성상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소란도 없었다. 마치 몸 불편한 동료들끼리 여행지에서 숙식하는 분위기였다. 일어난 순서대로 씻고 단체로 식사를 하고 회진 온 의사 선생님 만난다. 그리고 정해진 코스대로 운동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으며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없이 자고 또 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잡다한 일을 하는 여성이었다. 평생을 새벽에 일어났기에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면서 원 없이 잔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뜨개질을 열심히 했다. 덧신도 뜨고 꽃무늬를 놓아 소파 커버도 뜨고...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기에 망정이지 팔을 수술했다면 뜨개질을 했겠어? 다리보다 손이 더 소중한 것 같아” 긍정적인 웃음을 웃기도 했다. 내 곁에 있던 분은 틈만 나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고추 모종했나요?” 시골 이웃과 주고받는 말이다. “하이고, 무슨 종자인지 소출이 많이 나야 해”, “ 그 집 고추 모는 해마다 좋더라고” 그들의 대화는 내가 복도에서 한참 동안 걷기 연습을 하고 들어 왔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한 가지 주제로 30분 이상 말을 이어가는 언변이 놀라웠다. “용건만 간단히” 그 옛날 공중전화기에 붙어있던 글씨가 생각났다.
창가에 있는 할머니는 영감님과 대학생 손자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영감이 오늘은 빨리 왔다. 내일도 일찍 와서 휠체어를 밀어주면 좋겠다.’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자가 오는 날은 혼잣말이 아니라 병실을 모든 사람을 향해 자랑을 했다. 장대 같은 키와 떡 벌어진 어깨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내가 키웠다오. 직장 생활 하는 며느리 때문에 낳자마자 내가 키웠지요” 손자의 볼과 등판을 쓰다듬으며 애정을 과시했다.
나는 주로 복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걷기도 하고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다. 병원 앞 도로를 끼고 흐르는 소양강이 봄 햇살을 안고 일렁이고 물새 떼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자동차로 오갈 때는 미쳐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넉넉한 시간의 부자들과의 나날들! 풍요한 물질로 비싼 옷을 산 것과 무엇이 다른가. 육체를 치장하나 영혼을 덧입히나 마찬가지 아닌가.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영으로 구성된 인간이니 말이다.
여유 속 몸을 담그고 또 다른 것도 얻었다. 바쁜 일상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한 동생을 저녁마다 볼 수 있었다. 춘천에서 홍천까지, 장거리 출·퇴근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동생이었다. 그 정성의 값을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자매간의 사랑도 여유로운 시간이 준 선물이었다.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라고 충고한다. 24시간을 48시간처럼 보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찌 기능적인 성과물만 중요한가. 복잡하게 엉키어 오작동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 아닌가. 최근에는 양질의 쉼이야말로 생산적 에너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던 ‘잘 살아보세’ 시대를 지나, 삶의 질을 중요시하는 풍조다.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의 풍요. 이는 진정 또 다른 의미의 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