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병실에서 재발견(再發見)한 진리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지소현 승인 2021-02-23 12:04:16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열 살 때 오른쪽 다리 결핵성 고관절염을 앓은 나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 걸음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삼 분의 일쯤 손상된 고관절로 인해 기능적 제한을 감내해야 했다. 직립보행 사람에게 엉덩이 관절은 얼마나 중요한가. 생식기가 있고 상체와 하체의 중심이다. 오죽하면 내 평생소원이 쪼그려 앉아 보는 것일까.


이처럼 남모르는 고난 속에서 비장애인들과 동일한 일을 하다 보니
50대에 이르자 남아 있는 관절마저 손상이 심해졌다.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왔고 밤이면 눕기도 힘들어 잠도 잘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서울의 모 병원에서 인공관절로 바꾸는 수술을 했다. 장장 5시간에 거친 대수술이었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아픔이었고 4개월에 거친 재활병원 생활을 했었다. 깨어 있음과 잠들어 있음의 경계조차 뚜렷하지 않은 무료한 시간들...


그 진공관 날들은 환우들과 소소한 우애가 그나마 활력이 되었다
. 각자 병문안 온 사람들이 가져온 과일을 나누어 먹고 식사 때면 감추어 놓은 밑반찬을 서로 권하며 따듯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모든 인간관계가 병실과 같다면 법도 규정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중에도 아직도 가슴에 남는 환우가 있다
. 그 당시 80세가 넘은 할머니였다.


치매가 있는 그분의 하루는
90세가 되었다는 남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이 전부였다. 아침마다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아 분홍색 그루프로 흰 머리칼을 중세시대 귀부인처럼 말아 올리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등 굽은 남편을 기다렸다. 젊어서 딴 살림까지 차려 마음고생을 시켰다는 할아버지! 그 시절을 참회라도 하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에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침대 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 휠체어를 밀며 산책도 하고 물리 치료실 앞 의자에서 할머니가 나올 때를 기다렸다. 병실 사람들은 그분들을 보면서 역시 나이 들면 부부 밖에 없어.” 입을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다
.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유는 할머니가 치료실에 있을 동안 할아버지와 커피를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왜 남의 남자에게 꼬리를 치느냐. 당장 그만둬.” 쩔쩔매며 아이 달래듯 변명하는 중년의 예쁘장한 요양보호사 아주머니를 보며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젊은 여자가 90세 남자를 연모하는 일은 벼락을 맞는 일만큼 확률이 적은 일인 아닌가.


그 사건 말고도 설날 연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 민망한 실화가 또 있었다. 환우들이 제각기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 돌아왔을 때였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할머니가 연실 눈물을 닦아 내며 틀림없이 다른 여자가 생겼을 거야. 그놈의 난봉 끼는 평생을 못 고치네.” 했다. 모처럼 할아버지의 팔을 베고 자려고 하자 뿌리치고 거실에 나가 잤다는 것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도 편히 자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고 저마다 달래는 말 한마디씩을 거들자 잠잠해졌다. 마치 일일연속극 같았던 말년의 부부, 지금쯤 이 땅에 계신지 궁금하다.


나는 그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인류 역사의 중심이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 드라마는 물론이려니와 불후의 명작과 유행가의 주제는 거의 다 사랑이다. 선남선녀의 사랑, 신분의 불균형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한쪽의 이익을 위한 인위적인 사랑, 이별로 끝난 애절한 사랑...


돌이켜 보니 관절염이라는 병마와 동행한 내 삶도 사랑 때문에 지탱한 것 같다
. 존재의 의미가 된 두 아들 역시 남편이 준 사랑의 선물 아니던가. 늙는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로 변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만의 특권인 모성으로 아름다운 노후를 장식할까 한다. 그 할머니처럼 치매가 걸려 해괴한 집착을 부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