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꽃샘추위
우안 최영식 화백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1-02-23 11:58:34


 

▲우안 최영식 화백

212일 설날을 형님 댁에서 4명이 모여 차례를 지냈고 수겸초당에 칩거해 연휴를 보냈다. 설 연휴가 끝나자 바로 영하권으로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거칠게 불어댔다. 꽃샘추위가 시작된거다. 18일이 평양의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거칠게 몰아대는 찬바람에 독기가 빠져있고 영하 10도라도 날이 무뎌진 것처럼 느낌이 다르게 와 닿는다. , 비도 내릴거라는 기상예보는 아직 유예되고 있는 중이다. 꽃샘추위는 겨우내 잠들었던 생명체를 깨우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봄을 불러오는 자연의 오묘한 작용이다. 인생사 또한 그렇지 않은가.


시련과 고난을 주어 단련을 시키고 그걸 극복하며 능력을 키워 업적을 남긴 인물 들을 살피면 그 과정이 보인다
. 안온한 봄날만 계속되면 허약해지고 불량이 된다.

 

봄이 가까이 왔다는 희망으로 꽃샘추위를 파악하기에 기꺼이 한파를 받아들인다.


똑같은 영하
10도라도 겨울에 들어설 때와 봄이 가까이 왔을 때가 다름은 그래서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희망이 있다면 헤쳐나갈 힘이 생긴다
. 절망은 희망이 안 보일 때 엄습하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겨울이 혹독하고 추울수록 봄을 기다림은 간절하고 맞이하는 기쁨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삶 또한 다르지 않다. 순탄함으로 이어진 생애는 행운일 테지만 깊이 각인됨은 없다. 또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락이 겉으로 노출되지 않아도 내상이 깊을 수 있기에 자신이 아니면 모르는 이면은 있기 때문이다. 봄이라고 어디 좋은 날만 있던가. 꽃샘추위처럼 겪어야할 통과의례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매사를 겉만 보고 평가할 게 아니다. 속은 모른다.

 

예전엔 삼한사온이 있었다. 사흘 춥고 나흘은 따듯한 날이 규칙적으로 오래도록 이어왔던 것이 슬그머니 없어졌다. 나라가 점차 발전하면서 불규칙한 삼한사온에 관한 언급이 좀 있더니 아예 사라졌다. 이번 겨울은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일어나, 미국은 그 거대한 국토의 70%가 엄습한 폭설과 한파로 전기가 끊기고 상수도가 얼어버리며 난방을 못하는 충격에 휘말렸다.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무방비였기에 혼란은 컸다. 인도는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아내려 겨울 홍수로 댐 두 개가 무너지고 물이 범람, 2백 명이 몰살하는 인명 피해도 컸다고 한다. 지진도 잦다. 무분별하게 아프리카 대륙의 밀림을 벌채하고 도처의 자연을 파괴하며 유해물질을 배출해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 온난화현상이 지구 곳곳에 광범위하게 이변을 일으키는 중이다. 절제를 모르고 방만해진 결과다.

 

세계가 물질만능으로 쏠리며 소비가 미덕이란 말이 나왔다. 어려서는 아껴 써라가 권장되었고 근검절약의 정신은 인류가 오래도록 실천 덕목으로 삼았던 터이다. 그런 전통이 지켜질 때는 자연도 보존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과소비가 번지고 그 결과는 쓰레기의 과다한 배출로 나타났다.


기하급수로 소비와 쓰레기가 늘어나며 당대만 살고 말 것처럼 자연과 대기를 오염시켜왔고 기상이변으로 되돌려받는 중이다
. 거기에 코로나19 같은 감당못할 감염병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가장 생소한 사회생활의 변화는 외출시 마스크 착용과 비대면의 일상화다
. 비대면은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학교, 회사, 공장이며 집회도 다중이 모이면 안된다. 모여야 하면 거리두기가 필수다. 스마트폰이 대량 보급되어 소통의 수단으로 쓰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평생 몸에 밴 만남의 습성을 눌러야 하는 건 고통이지만 어쩌랴
. 최상의 수단인 것을.

 

인류가 저질러온 온갖 병폐를 고치지 못하니 자연이 스스로 바로잡고 치유하러 나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떤 방법도 먹히지 않던 공해물질 배출이 줄어들고 대기는 불투명에서 맑음을 되찾고 있다. 방종에 가까웠던 자유도 줄어들며 소비도 예전처럼 할 수 없다. 세상만사는 한 면만 좋은 법은 없다. 양지가 있으면 그늘이 따르듯 호, 오는 양면처럼 같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싫고 나쁘면, 그 반대도 꼭 따른다. 꽃샘추위가 시련을 주며 겨울을 벗어나 봄맞이하며 꽃을 피어내게 만드는 이치와 같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온 가치관을 바꾸지 못하니 비대면 생활하며 거의 상실한 정신적인 면에도 시선을 돌려 조화와 균형을 갖추라는 배려처럼 여겨진다. 삶의 지혜는 넘치도록 축적되어 있건만 외면해 왔음이다. 인류의 큰 스승인 석가모니, 예수, 공자도 물질을 숭상하라 말하지 않았다.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라는 시련으로 받아들인다면 미래의 희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