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세한[歲寒]의 계절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0-12-22 11:46:00

 

우안 최영식 화백.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 청명하고 별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簫簫]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듯 말듯 사운거리다가도
,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울타리 삼아 뒤안에 우거져 있는 대밭이나, 고샅에 저절로 커 오르는 시누대,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왕대잎의 대바람소리는, 그저 언제나 물결처럼 이 대실[竹谷]을 적시고 있었다.


근년애는 이상하게
, 대가 시름거리며 마르기도 하고, 예전처럼 죽순도 많이 나지 않아, 노인들 말로는 대숲이 허성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늘을 가리며 무성한 대나무들은 쉬흔 자[五十尺]의 키로 기상을 굽히지 않은 채 저희들끼리 바람을 일구는 것이었다. 최명희 대하장편소설 혼불 1에서

 

대나무는 문인화[文人畵]의 사군자[四君子] 중 겨울을 상징하고 대표한다. 봄이 매화, 여름은 난, 가을이 국화로 사계절을 대표한다. ‘대쪽같은 성격이라 하듯 올곧은 이를 표현한 형용사다. 혼불은 10권으로 채워진 소설가 최명희의 생을 다한 역작이다, 그 시작을 대숲 묘사로 두 쪽이나 이어진다. 참으로 섬세한 정서가 교직된 호홉이 긴 문장이다.


앞에 옮긴 것은 그 중 절반도 안된다
. 설한풍[雪寒風], 눈 내리고, 추위, 찬바람 속에서 꼿꼿한 곧음과 푸른 기상을 잃지 않으니 충절의 모습으로 기림을 받는다.

 

더불어 소나무가 대나무와 짝을 이룬다. 겨울을 다른 말로 예전엔 세한[歲寒]이라 불렀다.


좁히면 연말연시 해가 바뀌는 추운 때를 세한이라 했다
. 최근에 추사의 세한도가 새삼 화제다.


1
천억원 대의 가치를 지닌 세한도를 소장자가 아무런 보상 없이 국가에 기증하며 그 미담이 기사로 방송 뉴스로 알려져서다. 제주도 유배 시절 그려져 중국으로 가져가 문인, 학자들이 모여서 감상 후 16개의 발문이 붙었고, 추사연구학자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가 한양에서 구입해 소장한 걸, 서예가 손재형선생이 몇 달을 전쟁 말기 동경에 머물며 애원해 양도받았다. 그 뒤에 교수의 서재는 폭격을 맞았으니 세상에서 사라질 뻔 했다. 기적 같은 일이다. 세한도가 탄생한 출발부터 거쳐 온 존재 과정이 국제드라마라 하겠다. 이시영, 정인보, 오세창 선생의 발문도 곁들여졌다. 이런 절절한 사연이 중첩된 작품이 세한도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그림만의 크기는 가로 69,2cm, 세로 23cm.


추사의 발문까지 해도
130cm니 큰 작품은 아니다. 감상 발문을 다하면 19, 7m로 길다. 국보 180호다.

 

세한은 고난과 시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추운 계절 모두 낙목한천[落木寒天], 잎진 빈 나무와 찬 하늘 속에, 변함없는 기상을 지닌 송백죽[松栢竹],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칭송하는 뜻이 무엇이겠는가. 추사의 세한도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젊은 잣나무 세 그루가 인적 없는 간촐한 빈 집과 함께 담겨있다. 쓸쓸함의 극대치 아닌가. 추사의 분신인 듯한 노송의 앙상함은 눈물겹다. 노송의 가장 굵은 아래쪽 등걸 한가운데는 텅 비어있다. 오른쪽 상층부에 한줄기 메마르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갸날픈 가지 끝엔 금방 셀 수 있을 정도의 엉성한 솔잎이 붙어있다. 엷고 진한 농담[濃淡]도 없이 초묵[焦墨] 한 가지로 메마르게 그어진 선들이다. 제주 유배 생활의 각박함이 보이는 듯한 필적이다. 추사가 직접 곁들인 발문엔 부귀와 권세를 가졌을 때와 상실했을 때의 세태를 언급하며 세한도를 그려주게 만든 우선 이상적의 변함없는 모습을 세한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견준다. 한 여름 다같이 푸를 때는 두드러질 일이 없지만 겨울이 되면 모두 시들어도 청청하여서다. 세한도가 세상에 출현하게 된 연유가 된다.

 

지구촌은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가 휩쓸며 역경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라마다 필사적으로 백신이며 치료제를 만들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울인 노력에 희망이 보이는 모양이다. 백신이 나오게 되었다는 희소식이 뉴스를 탄다. 아직 만족할 수준은 아니라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새로운 백신 개발엔 축적한 자료와 기술이 있으니 선진국이 앞선다. 백신이 실제 약효를 발휘해야 비로소 코로나19를 제압할 수 있다. 역사를 보면 중세기에 흑사병을 비롯해 여러 역병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음이 기록되어있다. 위생을 몰랐고 의료기술이나 체제가 안 갖추어진 시대였다. 현대의 발전된 체제에서 이런 감염력이 큰 코로나지만 해결하지 못할 줄은 예상 밖이다. 지니친 자만이었던 걸까. 모든 면에서 큰 교훈이 된다. 문명의 취약점을 개선하고 가치관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무분별한 자연파괴도 멈추어야 한다. 물질의 도취가 아니라 정신의 만족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 세한도가 제시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역경을 견디며 열악한 환경속에서 사제지정이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덕목에 새삼 눈뜨게 되는 이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