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남의 덕에 산다.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지소현 승인 2020-12-22 11:43:49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올해 여름 일이다
. 고향 친구에게서 오후 230분 터미널 도착 버스로 햇감자를 보냈다는 전화를 받았다. 포실포실 뽀얀 맛을 생각하니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다. 유년 시절 보라꽃 줄지어 핀 감자밭 이랑이 떠올랐다.


추억에 들떠 알려준 시간보다
20여 분 일찍 터미널로 갔다. 하차장 옆 코로나19’ 방역텐트 주변을 서성이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을 쳐다보기도 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느긋함을 즐겼다. 드디어 버스 도착 3분가량이 남았을 때다. 갑자기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경험에 의하면 심상치 않은 통증이다. 가시넝쿨이 스치는 듯이 하다가 잠깐씩 멈추는 아픔! 점심에 참기름과 나물을 듬뿍 넣어 비벼 먹은 보리밥이 화근이었다. 하체에 힘을 주고 진땀을 흘리며 버텼다. 하지만 도저히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를 어쩌나. 금방 버스가 올텐데...’


남모르는 긴급 생리현상을 겪고 있을 때 마침 곁에
60대 정도 되는 아저씨가 보였다. “혹시 230분에 도착하는 강원고속 기다리시나요?” 망설임 없이 말을 걸었다. “, 짐 받으러 나왔습니다.” 순간 창피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용기가 났다. “갑자기 배가 아파 그러는데 제 짐도 꺼내서 이 자리에 놓아 주시겠어요?” 마음씨 좋아 보이는 그분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아하! 귀인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상자에 쓰여 있을 내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나의 대장 상태는 내가 잘 안다. 실수라도 했을 때 뒷감당을 상상하니 아찔하다. ‘하나님! 기적을 베풀어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고군분투(?) 끝에 무사히 인간으로서 최대치 수치를 모면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버스 도착 5분이 지났다. 이번에는 화장실에서 하차장을 향해 뛰었다. 먼발치에서 보니 그분이 없다. 감자 상자가 궁금해 헐레벌떡 다다라보니 원하던 자리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칠칠치 못한 낯선 아낙네 짐을 꺼내 놓고 생색 없이 홀연히 사라진 그분은 어떤 사람일까?’


나라면 처음 보는 사람의 무거운 짐 부탁을 들어 주었을까
? 그랬을 거라고 장담하기 힘들다. 남의 일에는 관심 없이 오직 내 입장, 나의 감정에만 집중해 왔으니 말이다. 참으로 못된 사람 중의 하나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지난날이 모두 남의 덕이었음을 깨달았다. 특히 40대 초반 천형처럼 어렵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었던가. 말 한마디라도 힘이 되었던 문단의 선배님들, 늦게 출발한 전문성을 요하는 직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상사와 동료들, 손에 땀을 쥐고 애틋하게 바라봐 준 혈육들과 친구들... 그들이 있어 고난의 터널을 무사히 지나 오늘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살면서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자주 했는가 하면 아니다. 그냥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움직여서 다 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하루하루가 누군가의 덕분이다
. 가깝게는 건설노동자의 피땀 어린 집, 농부와 어부의 수고가 깃든 식재료, 공장 근로자 노력의 산물인 옷가지들, 자동차, 휴대폰, TV, 의사, 약사, 간호사... 멀게는 누군가가 꿈을 향해 분투한 결과물인 최첨단 문명 등등. 오직 나만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것만큼 커다란 착각이 어디 있으랴.

 

사투 끝에 얻은 전리품 같은 감자 상자를 자동차에 싣고 나니 온기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의 햇감자 상자에는 온 세상이 담겨있었어.’ 나만의 웃지 못 할 사건과 깨달음을 알 리가 없는 친구는 간지러운 내 메시지에 많이 못 보내서 미안해.’라는 답을 보내왔다. 주고도 미안하다는 말! 그 또한 환한 아침 햇살이 되어 교만의 그림자를 밀어 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