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역사의 수레바퀴 닦기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지소현 승인 2020-11-24 11:08:47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나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일상용품들은 반짝거리도록 닦아야 속이 후련하다
. 예를 들면 욕실의 수도꼭지나 샤워기 꼭지들이다. 마치 멋쟁이 여인의 반지, 목걸이, 브로치처럼 집안 곳곳에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제품들... 그것을 닦아대는 나만의 버릇은 어린 시절 각인된 귀중하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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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내 고향 평창 산골은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나들었다. 만나는 이웃들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였다. 배고프지 않은 것이 안녕의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그 시절 어느 날이다. 우리 집 밥상 아버지 자리에 은빛 찬란한 밥그릇과 국그릇이 놓여있었다. 처음 본 스테인리스였다. 출처는 읍내 농업고등학교 재학 중인 언니가 반공 웅변대회에서 2등 상으로 받아 온 것이라 했다. 아버지는 미소가 가득했고 언니 역시 자랑스러움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깨지거나 이빨 빠질 걱정 없는 깨끗한 그릇이 나오다니, 참 좋은 세상이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밥주발을 정성스레 닦아서 찬장 맨 위에 올려놓았다. “스뎅이 최고야. 평생 놋그릇 닦느라고 골병이 들었는데...”어린 나는 어머니 손목을 보호해주는 스테인리스가 덩달아 좋았다. 그 후 언니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웅변대회에서 스테인리스 주발을 타 날랐고 가족 모두가 하나씩 차지했다. 그야말로 맏딸로서 살림 밑천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이어서 졸업 무렵에는 밥주발보다 몇 배가 큰 스테인리스 세숫대야를 들고 왔다. 영국 신사 중절모를 닮은 세숫대야! 고귀함의 극치였다. 가장자리에 평창군 반공 웅변대회 일등 상이라고 글씨까지 새겨져 있어 가보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는 그 보물을 언니의 혼수로 쓴다고 뒷방 선반에 고이 모셔놓았다.


우물가에 나뒹구는 찌그러진 양은 세숫대야가 싫었던 나는 언니의 세숫대야로 우아한 세수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어느 날 혼자 집에 있을 때다. 아무도 몰래 써볼 요량에 잡곡을 넣어 둔 나무뒤주를 딛고 올라서서 선반의 보물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조심조심 포장을 뜯자 쨍하니 모습을 드러낸 세숫대야
! 우물가로 달려가 물을 퍼 담으니 하늘아래서 가장 맑은 옹달샘이 되었고 손을 담그자 뼛속까지 씻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들이닥칠 것만 같아 세수는커녕 손만 대충 씻고 물기를 닦고 또 닦아 제자리에 두기까지는 기동대의 움직임이었다. 그 후 나는 언니와 어머니 앞에서 몰래 양심을 닦아내며 몇 년을 보냈다. 드디어 언니가 시집가는 날이 왔다. 보물 세숫대야는 물론 스테인리스 요강, 밥주발, 수저, 국그릇 등 귀한 혼수품을 트럭 가득 실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80년대 중반, 내가 결혼을 할 무렵에는 스테인리스 그릇은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물건으로 변해 있었다. 이어 최근에는 스테인리스 식기들이 살림목록에서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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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를 바라보는 언니에게 물었다. 여고 시절 웅변대회에서 타온 보물 세숫대야를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고... 집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리석 궁전 같은 주택에 온갖 최신식 살림이 가득한 언니에게 스테인리스 세숫대야는 안중에도 없음이 당연하다. 내가 그 세숫대야를 몰래 개시했노라 늦은 고백을 했을 때도 화를 내기는커녕 배꼽을 쥐고 웃었다.


생각해 보니 내 가슴에 새겨진 스테인리스 반짝임은 마지막 보릿고개의 증표가 아닌가 한다
. 그래서 가난했으나 마음만은 넉넉했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루만지는 기분으로 스테인리스 용품 닦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