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라미 일기] 입동[立冬]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0-11-17 11:11:11


 

▲ 우안 최영식 화백.
 

117일이 입동이었다. 이제 가을은 끝나고 겨울로 들어섰음이다.


발산리 수겸초당에서 세 번째 맞이하는 겨울이다
. 어느 때보다 안정된 겨울 접대라 하겠다. 아직 좀 미흡함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가장 정리가 제대로 된 상태이기에 마음은 안정되고 생활은 편하다. 시내에 있는 옥천화방도 현장학습을 빌미로 먼저 정리가 되어 수, , 수업은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무질서하게 우격다짐으로 초당 책장에 꽂힌 책들도 비로소 우선 키맞춤부터 하며 점차 분류작업도 진전시키고 있다. 작업을 하다보면 몰입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힘든 일은 아니다. 같은 종류 책 찾아 이 방, 저 방, 마루에 늘어선 책장을 두루 헤매느라 자잘한 움직임은 빈번하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아직은 판단이 안되지만 초당이나 화실이나 들어앉으면 좀체로 울 밖을 안나가게 된다. 하는 일이 딱히 없을 때도 그렇다. 요즘처럼 손가야 할 게 많으면 시간까지 빨리간다. 가속도가 붙은 듯 싶어질 정도다.


살아오며 무언가 내 생각을 추진하고 실행한 바가 없다
. 그럴 형편이 주어지질 않았다. 환경과 상황이 형성되면 최선을 다해 적응은 잘했다. 새로운 인연들이 맺어졌다. 무리하지 않았고 감당해냈다. 어느덧 6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있다.


병약했던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기적같은 수명이다
. 누구도 내가 장수할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돈으로 겨우 살려냈다고 했으니까. 저 병약한 게 사람노릇을 하면 기적이라고 가족들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끝이 없을 듯 험한 고개길이 계속 놓여져 있었던 삶이다.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현재를 숨가쁘게 살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구상도 가져보지 못하고 추억에 젖어들 여유도 없었다. 오직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급급했다. 극심한 지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하루도 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독하느라 속독, 난독이고 정독이나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보는 재독의 경우란 드물었다. 그러니 축적되거나 체계가 없는 처지에 빠졌다. 다독 덕분에 각계각층의 인물을 만나며 대화하는데 큰 도움은 받았다. 춘천에서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지금에 비하면 바닥이 좀 좁았던 편이다.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화실의 위치 때문에 자연스럽게 했다. 신문사와 방송국, 시청, 도교육청, 도청, 시립문화관이 다 가까이 있었다.


경찰서 정문 맞은편에 구
, 제일극장 건물이었으니까. 1층은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고 2층은 영사실이던 공간이 사무실로 바뀌어 화실로 내가 쓰고 있었다.

 

서점에 가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빈 손으로 오는 법은 없었다. 몇 권 씩 구입했다. 처음엔 값싼 헌책뱅을 애용하다가 형편이 나아지며 신간을 더 선호하게 됐다. 책이 늘어나는 게 행복이었다. 월부책 카드가 10여 장이라 월말이면 수금하러 드나들어 화실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었다. 유일하게 아끼지 않은 게 책 구입이었다. 그렇게 모인 책들이 지금은 초당의 대부분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책 부자라 나는 좋은데 주거가 바뀌면 가장 곤욕을 치뤄야 하는 난관이 된다. 소양로 시절에 지금 소장한 책의 절반가량 되는 분량을 버린 적이 있다. 어머니와 처가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아서 포기했었다. 엿장수였나 고물상에 넘겼던가 그랬다. 혼자만 애지중지하는 대상이었다. 책에 대한 애정은 생명이 있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