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가을, 그 쓸쓸함에 대하여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지소현 승인 2020-11-10 11:18:54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깊어가는 가을, 길가 은행나무 잎이 햇살보다 밝다. 파란 하늘을 씻어 내린 찬바람에 살랑살랑 가는 세월을 향해 손 흔들고 있는 샛노란 잎새들! 갑자기 지난 초봄 처음 보았던 꽃잎 닮은 노랑나비의 팔랑거림이 알싸하게 가슴에 박힌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을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도 돋는다. 단 한 번뿐인 삶을 자각한 절대고독이 발진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해가 저무는 끝자락 가을은 온통 쓸쓸함이다
.


이른 새벽 찬 서리를 하얗게 덮어쓰고 묵묵히 해를 기다리는 들국화의 인내가 그렇고
, 여물대로 여물어서 저절로 튕겨나간 씨앗의 흔적을 몸 비틀어 감춘 콩 꼬투리가 그렇다. 그리고 여름내 햇살 매를 맞아 시퍼렇게 멍들었던 옥수수 대가 갈색 바람에 상처를 아물리며 서걱대는 풍경이 그렇다.


어디 그뿐인가
.


추수 끝난 밭고랑을 쌩하니 지나 오솔길로 접어드는 바람
, 짙푸르던 기상이 삼베옷 자락으로 변해 너부러진 잡초들, 뻐꾸기 붉은 울음이 사라진 산등성이에서 들리는 목쉰 까마귀의 검은 울음, 녹슨 바늘잎을 털어 능선을 덮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낙엽송들... 온 산천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라가는 강물 같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다
. 가을 하늘 진홍색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혼자 보기 가슴 벅찼다. 가장 가깝다고 믿고 있는 벗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갑자기 내가 없어도 즐거울 수 있는 그에게 치졸한 질투가 올라온다. 허전한 마음에 손거울과 얼굴을 맞대 본다. 진피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탄력의 흔적을 더듬으며 뺨과 이마를 톡톡 두드린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바람 빠진 풍선의 감촉이 코끝에 찡한 전율을 몰고 온다.


그 누가 말했던가
.


다섯 살 시절
1년은 인생의 1/5이라서 길게 느껴지고 50살의 1년은 인생의 1/50이라서 짧게 느껴진다고... 그래서 나이 들수록 일주일 전도 어제로 착각하고 심지어 방금 일어난 일도 잊어버린다고 했다. 어찌 그뿐인가. 살아오는 동안 가득 차버린 기억의 저장고에 최근 일들을 억지로 구겨 넣으면 과거와 뒤섞여 말도 횡설수설하게 된다.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오고 찬바람이 곤충과 식물을 잠재우리라
. 노랑나비 시체 같은 은행잎, 찬 서리에 의연하던 국화꽃, 삼베옷 색깔의 잡초들, 빈 콩 꼬투리와 빈 옥수수 대궁은 다시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리라. 함박눈이 내리고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겨울 아침, 얼어 죽은 까마귀 이야기가 전설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찬바람 가득한 도심 전깃줄에서 새까맣게 울어대는 까마귀들이 장송곡 연주자들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모두는 안다
. 마른 잎 스러진 땅속에는 새봄을 기다리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나고 죽는 불변의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 그래서 쓸쓸한 회색빛 가슴에 밝은 색을 칠해본다. 잠시라도 미웠던 벗의 흔적에 따듯함을 입히고 탄력 잃어가는 피부에 투명한 미소를 입히리라.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내 몫의 시간이 종착지에 다다르면 부서지면서도 씨앗을 덮어 주는 낙엽처럼, 다음 세대를 사랑하리라. 가을, 그 쓸쓸함에 대하여 남아 있는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나는 또 다른 추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