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11월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0-11-10 11:17:08


 

▲ 우안 최영식 화백.

시월의 대부분이 맑은 날로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11월 첫 날에 잔득 흐리고 얌전한 비가 내렸다. 하필이면 흐리고 비가 내리는 게 확실한 날에 강촌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가서 남긴 벌초를 마저 하고 묘비가 오래되어 새긴 글씨에 입힌 검은색이 지워져 백비나 다름없어 글씨에 색을 입히자는 일이 주목적인 행보였다. 시급을 요하는 건 아니지만 형님이 강행하는데 묵묵히 따랐다. 한솔이도 함께 했다. 멈칫대고 있던 빗방울이 산소에 도착하자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기도 애매한 약한 빗방울이다. 비석의 전면 글씨는 내가 칠하고 뒷면은 한솔이가 했다. 형님은 손이 덜간 풀을 깎고 묘를 둘러싼 쥐똥나무를 다듬었다.


묘 옆 약간 윗쪽에 있는 소나무는 이번에 유난히 아름드리로 변한 모습이 어느때보다 강하게 눈길을 끌었다
. 묘를 쓸 때 저 소나무는 굵기가 내 팔뚝 정도였고 키도3~4미터 남짓했었다. 50여년이 지나며 거묵의 풍채를 가지게 되었다. 해마다 가도 성장을 느끼는 건 몇 년에 한 번씩이었다. 내 다리 굵기가 되는데 그 뒤로 10여년이 지나고 반 아름 굵기는 20여년 걸린 듯하다. 굵기와 크기에 비해 나무의 형태는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부친 묘 주변에선 소나무로 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을 다해도 가장 큰 나무에 속한다. 몸통엔 아래부터 등걸에 푸른 이끼까지 끼어서 풍채가 돋보인다. 묘소에 가면 먼저 눈길이 간다.


둘째 날은 어제 일이 거짓말인 듯 날씨가 맑았으나 기온이 부쩍 내려가 찬 기운이 돌았다
. 마침 초당 보일러도 기름이 떨어져 3드럼을 주유소에 주문해 채웠다. 아침 저녁으로 한 두 시간씩 가동하던 걸 이젠 겨울맞이로 풀가동할 판이다. 기름 값이 작년에 비해 많이 내려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입동이
7일인데 벌써 완연한 겨울 분위기로 급속히 바뀌었다. 해도 짧다.


세월은 또 어찌 빠르게 가는지 당황스러울 정도다
. 하루가, 한 달이, 한 해가 떨어지는 유성처럼 순식간이 지나간다. 평생해온 예업도 미흡함만 눈에 띄고 아직 만족할만한 세계는 닿지 못하고 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 열어둔 상태다. 전력투구할 환경은 아직 못 갖추고 있으면서 그렇다.


수류화개 연작을 풍부한 변화와 다양한 필치로 추구하며 매화의 거침없는 표현과 전개
, 소나무의 원숙한 세계를 펼쳐나가는 것이 내 화업의 마무리가 될 것이다. 작가의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환경과 여건이 주어져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건강은 필수다. 현재는 정리조차 되지 못한 상태로 안정이 안 된다. 거의 된듯 하다가도 다시 뒤엉키는 식으로 시간과 체력을 소모하고 있는 중이다. 꾸준히 화필을 잡았지만 한번도 전력질주를 못해봤다.


단절되지 않고 평생을 그려올 수 있던 것만도 행운일까
. 무엇도 충족되거나 채워진 적은 없다. 늘 부족하고 아쉽고 간절함만 감돌았다. 주거와 화실의 잦은 변동이 말해준다. 집도 화실도 만족한 환경을 못가져봤다. 여건이 그랬다.


살아오며 네 분의 스승이 있었다
. 그림은 소헌 선생님과 남천선생님의 은혜를 입었다. 정신 쪽으론 무위당 선생님과 박해조 선생님이 있다. 독서를 통한 스승은 다 꼽을 수 없겠다. 살아오며 무엇에도 사로잡히거나 매료되어 심취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니 무슨 취향이라 할 것도 못 가져봤다. 집착과 욕심도 없었다.


주어지는 대로 거기에 적응하는 식으로 살았다
. 내가 무엇을 찾고 꾸민다는 일은 분에 넘치는 것이라 추구도 못해봤다.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었으니 그 외에 취미란 걸 가져본 적이 없다. 한 때 클레식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유일한 일탈이었다. 청각장애인으로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거로 여겼던 세계였다. 볼륨을 높여 들어야 해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음악은 바라 덕분이다.


내 생애에 그림 외에 가장 깊이 빠졌던 공간이 고전음악다실 바라였다
. 글쓰기 습관이며 고전음악에 젖어들게 만들어줬다. 만나는 사람들도 평소 만나던 이들과 좀 달랐다. 대부분 당시의 나보다 젊은 세대였고 성향이 다양했다. 바라노트가 내 일기장같이 됐고 단골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었다. 내 생애 전체 중 가장 안정되고 내적 성장을 한 시기일 터이다. 어쩌다 터줏대감 같이 되어 있었으니까.


바라에서 읽고 쓰고 들었다
. 들은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들은 게 컸다는 의미도 담겼다. 내 황금시기였다는 생각도 든다. 나 같은 단골들이 대부분이었으리라. 당시엔 춘천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하긴 삼라만상 모두 오묘하지 않은 게 있을까. 다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