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첫 수업
우안 최영식 화백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0-10-20 11:13:31


 

▲ 우안 최영식 화백.
 

913, 달샘이 깨워서 오후 1시경 일어났다. 늦도록 잠을 설쳤기에 아침이 되서야 깊은 잠이 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언제 일어날지 몰랐을 거다. 연산골에 가서 한식으로 아점을 먹었다. 반찬이 풍성하고 맛나다.

식후 나오다가 고은리에 오래 전에 써준 현판 생각이 나서 찾아갔다.


성씨도 어슴푸레 했는데 마을 입구에
칠원윤씨동천문파비각표지판이 있어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의 사과밭은 붉은 색이 가지가 휘도록 달려 현실이 아닌 그림같았다. 낙관 글씨를 보니 정축년 가을에 쓴걸로 나온다. 1998년이다. 22년 전 내 솜씨다. 고은리 앞쪽 외곽도로를 다닐 때면 간혹 현판글씨가 떠올랐지만 다시 보게되지 않았다.

 

칠원윤씨동천비각[漆原尹氏東川碑閣]’의 현판은 기억속에서 보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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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터가 넘었다. 그 뒤쪽에 있는 종훈[宗訓]’은 잊고 있었다. 이 또한 대형 현판이다. 기록하지 않아서 그렇지 비석이며 묘비 등 써준 게 상당수 된다.


앞만 보고 뛰듯 살아온 삶이라 무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 사진으로 찍어 놓지도 못했다. 이제야 더러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어감을 실감하게 된다. 여러 감회가 오갔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고 자신도 수업에 힘든 달샘이 기꺼이 응해줘서 3시 반에 출발 한계령을 넘어 낙산 바닷가에 도착. 한계령은 가을이 절정이었다. 햇살이 밝은데 안개가 동해쪽으론 휘감고 있다. 이런 비경이 화폭에 제대로 담긴 걸 거의 못봤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전망을 마음에 담았다. 심오한 산수화를 보는 사람들이 꽤 된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이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힘찬 몸짓에 빠져들었다. 바람도 없고 쌀쌀하지도 않았다.


모래사장엔 언제 떠밀려 쌓인건지 나무더미들이 성처럼 줄지어 있다
. 사람들은 멀리 뜨믄 보여도 다섯 손가락도 못 채우는 숫자가 있었다.


내일 첫 수업을 앞두고 긴장되는 걸 간파한 달샘의 배려로 동해를 찾아 거친 파도의 밀려드는 힘과 그 우뢰같은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 산막골 들어가기 전까지 근 30여년을 해왔던 일이다. 긴 공백이 있지만 생각지도 않던 기회가 갑자기 생긴거다. 살아오며 의도한 건 별로 없었다. 주어지는 대로 대처해왔었다. 한계령을 만나고 바다를 보며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 않던가.

 

14일 오후 3시 옥천화방에서 배우러 온 다섯 분을 만나 수업을 시작했다.


묵촌화실을 문 닫은 후부터 손 놓아던 거다
. 27년간 한국화를 가르쳤었다.


앞으로 두 달간 매주 수
, 목 이틀 간 매, , , 죽과 문인화, 소나무, 산수를 가르치게 된다. 주어진 일정에 비해 과한 스케즐이다. 이런 방식의 경험이 없어 우선 욕심을 부려봤다. 공부하며 논의를 통해 조정해 나갈 생각이다.


화실로 나가며 내 귓바퀴는 무슨 죄인가 싶었다
. 안경다리가 걸쳐지고 귀걸이형 보청기가 올려졌고 마스크 끈도 휘감으니 귓바퀴의 소임이 막중하다. 다 걸쳐지는 게 신기할 정도다. 단골 의료기기 판매점에 들려 보청기 점검도 받았다. 몇 년 배웠다는 분 세분에 처음이라는 분이 둘이다. 과연 얼마나 기대에 충족시킬 수 있을지 현재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덕분에 화실에 정리안 된 것들이 말끔히 해소되고 규칙적으로 나가야 하게 됐다.

 

초당은 아직도 어수선한 상황이다. 시간이 되는 대로 달라붙어야 한다.


집은 작고 물건은 많으니 만만한 게 없는 형편이다
. 어쩌랴 하다보면 해법이 생길 것이다. 체력을 안배해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흩어져 있는 내 자료들도 이번 기회에 챙겨나갈 기회로 삼으려 한다. 60대 후반의 나이, 언제고 주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작품하는데 빠져들게 되면 또 뒤로 미룰 수 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계기가 주어진 게 고맙기도 하다. 억지로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다. 대처헤 나가기 힘겹지만 때가 되어서 해야 할 일을 하는거다 여기며 자신을 다독여 나간다. 삶이란 일기일회[一期一會] 아니던가. 되풀이는 없다. 늘 한번 뿐인 새로운 날들이다. 분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