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살 이야기

지소현 승인 2020-09-08 10:31:53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직장 내 장애인인식개선 강사 )강원도장애인체육회 이사

 

나는 어린 시절 살 한번 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몸무게가 겨우 25 킬로그램이었으니 완전 아프리카 소녀 모습이다. 가끔 아버지는 투박한 당신 손으로 대나무 막대기 같은 내 손목을 동그랗게 말아 쥐고 겨우 요소 한 포대 무게라니, 밥 좀 많이 먹어라당신 책임인 양 안타까워 하셨다.


사실 보릿고개 그 시절엔 먹을 것이 부족해 부잣집 마나님이나 도련님 외에는 통통한 사람이 드물었다
. 개구쟁이들은 헐렁한 바지춤을 한 손으로 잡고서 뜀박질을 하였으며 젖 떨어진 아가들은 영양실조로 수박덩이처럼 부푼 배를 안고 뒤뚱거렸다. 그리고 아낙들은 계란처럼 불거진 광대뼈가 뽀얀 살로 뭍일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요즘 들어 가끔 매스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 사람들을 보면 그 시절 생각에 가슴이 짠하다
. 미물도 한평생을 먹잇감을 찾는 일에 바치거늘 사람에게 있어 식량에 대한 의미는 얼마나 소중한가.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너도나도 넘치는 영양에 살찌는 걱정하는 현실이 꿈만 같다. 아니 축적되는 영양분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 식품을 먹고 심지어 일부러 굶기도 하는 것이 신기하다. ‘밥 많이 먹어라하시던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감격하실까.


보릿고개 시절
, 살찐 것이 부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마른 몸이 부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날씬해야 자기관리를 잘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뚱뚱하면 자기 투자를 할 여지가 없는 무능한 사람 취급을 당하니까. 이처럼 반대가 되어 버린 시대에서 말라깽이던 나 역시 오십 줄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옆구리 살이 교과서 두껍기로 쳐지더니 국어대사전 부피를 거쳐 두꺼비 형상이 되고 있음을 어찌하랴
. 미관상 좋지 않은 것은 접어두고서라도 인공관절 수술을 하던 날 절대로 뚱보가 되지 말라하시던 의사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더럭 겁이 났다. 평생 애물단지였던 다리를 지키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쉬운 방법으로 바르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로션을 옆구리와 배에 바르고 벌겋게 될 때까지 직접 두드리는가 하면 과감하게 식사량도 줄였다. 매일 한 시간씩 걷기와 수영을 하고 틈만 나면 체중계에 올라서서 바늘의 움직임을 살핀다. 하지만 좀처럼 변화가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오후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야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동안 나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붙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물론 자다가도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고 늦은 밤 망설임 없이 족발이나 통닭을 시켜 먹었다
. 허기졌던 시절 한풀이라도 하듯이 입이 하자는 대로 충실했다. 덕분에 야식을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프고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포기할까? 아니야. 절대로 50 킬로그램이 넘어선 안 돼.’ 수없이 각오를 다지며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체중계 바늘이 침묵을 깨고 간들거리며 왼쪽으로
200그램쯤 이동했다. 성취감에 걷기, 수영, 굶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 드디어 3개월 만에 3킬로그램이 줄었다. 학창시절 성적이 올랐을 때처럼 뿌듯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 이번에는 맞는 옷이 없어 낭패다. 하의 허리는 세탁소에서 줄였으나 윗도리마다 헐렁해서 볼품이 없다. 동생이 이번 기회에 최신 유행 옷으로 10년은 젊게 입고 다니라고 거든다. 솔깃하여 멋지게 변한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은근히 설렜다.


하지만 얼마 전에 생각을 바꾸게 한 사건이 생겼다
. 한 모임에서 날씬한 몸을 자랑하며 나타난 친구가 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달라붙은 윗도리에 짧은 치마, 유행하는 레깅스를 신었다. 뒷모습은 20대인데 마주 앉아보니 영 아니다. 탄력 잃은 얼굴은 생머리와 맞물려 초췌하기까지 하고 내복을 연상하는 레깅스가 맵시는 고사하고 휘어진 무릎을 흉하게 드러나게 했다.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생애 주기별로 다르구나!’ 갑자기 적당히 살이 오른 다른 친구의 모습이 진솔하고 더 예뻐 보였다. 살을 빼고 쇼윈도우의 마네킹 옷을 벗겨 입어보리라던 내 상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던가.


고기에서 고기 골라 먹고 술에서 술 골라 마시고 임금님만 먹던 요리도 원하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세상
! 살쪄보는 것이 소원이던 그 시절 꿈을 순식간에 이룰 수 있는 세상! 살을 빼려는 사람들의 욕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해 본다. 성인병 등 건강상의 이유도 있으나 내면보다는 외형의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허영심도 분명 한몫하고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남들 보기에 그다지 뚱뚱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은 체격이었다
. 살을 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야 옳다. 살을 빼든 살이 찌든 과유불급의 이치를 깨닫는다. 이제는 진정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위해 무엇이든 욕심을 비워내는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며 살리라 마음먹는다. 중용의 미덕이 사람의 살집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