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라미 일기] 올미솔밭
우안 최영식 화백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0-09-08 10:29:42


 

우안 최영식 화백. 


9
3일 아침에 9호 태풍 마이삭이 지나갔다. 새벽녁엔 비바람도 거세져 가장 취약한 보일러실 지붕이 들썩이는 소리를 들었다.


보청기에 새 배터리로 갈아 끼운 덕분에 들을 수 있었다
. 보청기를 안 끼면 천둥번개 치고 태풍 지나가는 소리가 아무리 요란해도 내겐 눈으로 보기 전엔 실감하지 못한다. 뒤따라 더 강력한 10호 태풍 하이선이 오고 있는 중이다. 그 경로는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향한다고 예측한다. 변수가 많으니 제발 비껴 가기만 바란다. 7일 쯤 우리나라를 거칠 모양이다. 54일인가 계속 비가 내렸고 잠시 며칠 맑을 때 위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던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그리고 9호 태풍이 지나자 뒤따르듯 10호 태풍은 역대급으로 강력하단다. 가을 기운이 순식간에 완연해 밤이면 선선하다. 낮에 바람도 시원해 열기는 없다. 처서까지 지났으니까.

 

오후에 갑자기 달샘이 올미솔밭에 가보자는 말을 했다. 전혀 예상 못한 제안이다. 달샘과 가보거나 올미솔밭 이야길 나눴던 것도 아니다.


옥천화방을 구하고 화방에 중고싱크대를 설치하려 구하고자 시내를 돌아다닐 때 올미솔밭 끝머리에 있는 한샘싱크까지 혼자 왔었단다
.


그러고 보니 산막골 들어간 이후 아니 그전부터 올미솔밭에 발걸음을 안한지 오래됐다
.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산막골 드나들며 늘 그 곁을 스쳤었다. 발산리로 나와서는 더 가까이 있으며 앞이며 옆이며 뒤로 무수히 지나쳤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솔밭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화천 광바위도 그랬다
. 정선 몰운대가 멀다지만 가고픈 마음이 절실했다면 몇 차례든 가봤을 세월을 그냥 지나쳤다. 올미솔밭과 정선 소금강, 몰운대는 몰입도가 높았던 소재들이었다. 내 성정이 이렇다.

 

보헌이란 아호로 치룬 마지막 개인전이 89년이었다. 거기엔 소나무가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90년부터 우안으로 바꿔쓰며 92년 개인전을 가졌다. 팜플렛엔 여러 점의 올미솔밭이 등장한다. 100, 60, 40호 등 비교적 대작들이다. 20점의 산수화와 7점의 소나무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실제 전시 작품은
60점이 넘었으니 일부만 담은 것이다. 대세는 산수화였고 소나무도 몇 점 더 있었을 테지만 숫자로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나무 화가라는 이름이 내게 붙기 시작한 개인전이다. 그림 값을 제대로 받고 1백호 소나무 작품도 판매가 된 최초의 경험도 이때 했다. 몇 년 동안 올미솔밭에 심취했던 시기다. 내가 처음으로 올미솔밭을 소재로 삼으며 몇 년 동안은 춘천서 열리는 미협전이며 동인전 등 대부분의 전시에 올미솔밭이 수묵화는 물론이고 수채화, 유화로도 다뤄졌다. 내가 다루지 않으며 그런 흐름도 끝난다. 무슨 약속이나 한듯 오래도록 소재 삼은 걸 못봤다.

 

올미솔밭의 옛 기억은 다 어디로 가고 다시 만난 솔밭은 생소할 정도로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솔밭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들인듯 주택들이 평범하지 않았다. 우수건축상을 받은 집도 있다.


예전에 건물은 솔밭 끝에 군대 막사같은 낡은 건축물이 유일했었다
. 솔밭 중간 가까이엔 기와를 구웠다던가 하는 훼손이 심한 가마가 남아있어 솔밭과 함께 화폭에 담기기도 했다. 가마는 없어지고 흔적도 안남았다. 소나무들은 더욱 청청해진 듯 하다. 한아름이 넘는 굵은 둥치와 훤칠한 높이가 풍기는 건 노태보다 젊은 기운이 더 크게 느껴진다 왜일까. 예전보다 솔잎이 더 무성해져서 인 듯하다. 잔기지와 중간 굵기의 가지 선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등걸과 촘촘하고 밀집된 솔잎만 시선을 잡는다. 솔밭의 건강 상태가 최고로 여겨진다.


솔잎의
40%가 지는 겨울에 와보면 또 다름 느낌의 솔밭을 만날거란 기대로 벌써부터 설레인다. 이제 자주 만나야겠다는 의욕도 모처럼 다시 생긴다.

 

92년 개인전 도록을 어떻게 주소를 알아내 대하장편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께 열열한 독자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고 몇 달이 지난 후 작가의 전화를 받았었다. 전지 크기에 올미솔밭을 담고 혼불에 나오는 솔밭을 묘사한 대목을 화제로 써넣었기에 그랬다. 전시 앞, 뒤로 그린 작품에도 여러 점 화제를 혼불에서 취해 쓰기도 했었다. 그해 시월 한글날에 세종문화상을 받으며 기자의 인터뷰가 중앙지에 한 면을 채우는 크기로 나왔고 내용 중엔 나와 국악인 안숙선, 나전칠기 장인이 작가에 의해 거론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작고로 작가와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전주의 최명희문학관을 방문하며 작가와의 인연을 회상할 수 있었다. 올미솔밭은 빈 곳에 후계목들도 심어져 잘 성장하고 있다. 더 이상 훼손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찾던 안 찾던 춘천의 소중한 자산으로 존재할 것이다.


50
, 백년 뒤를 떠올리면 얼마나 더 훌륭할 것인가. 솔밭에 화실을 두는 행운이 과연 내게 올 것인가 하는 뜬금없는 희망도 생겼다. 꿈이라도 꾸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