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복지단상]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 인간으로써 고귀사명
세월 따라 변한 인식을 돌아보다

지소현 승인 2020-06-23 16:36:35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출산장려에 대한 정책이다. 아이를 출산하면 국가가 출산비나 양육비를 보조해주는 것은 물론 셋째 아이부터는 고등학교 교육까지 정부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주변의 젊은 부부들이나 미혼 남녀들은 그 정책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 인생이니만큼 자식을 몇 명 낳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태도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견고한 삶의 자세에 영악해진 세상인심을 새삼 느낀다.

 

어린 시절 60년대를 돌아보면 자녀의 수가 5·6남매가 대부분이었고 그 이상이면 다복하다는 소릴 들었었다. 특히 가부장제도에 근거하여 성()을 잇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한 가정의 필수 요건이어서 아들이 많을수록 복 받은 집안이었다. 덧붙여 조상이 보이지 않는 음덕을 쌓아서 자식농사가 잘 되었다고 은근히 존경까지 받았다.


때문에 불행하게도 딸만 낳을 경우 아들을 둘 때까지 자식을 줄줄이 낳아 딸 부잣집에 아들하나가 달랑 있는 모습은 흔하였다
. 그리고 특별한(?) 현상으로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들 생산용 첩을 들이는 집이 있었다.

그 때 본처는 오로지 조강지처라는 신분에만 의지하여 처분만 바라는 죄인으로 살았다
. 이렇듯 아들을 낳기 위한 전력투구가 출산율을 높이는 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싶다.


하지만
60년대에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정부가 일부일처제의 제도를 만든 데 더하여 산아제한을 장려하였다. 맞물려 사람들은 잘 사는 조건 중의 하나가 배움에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였다. 그 과정 중에 영원한 내 것인 아들은 고등교육을 시키고 남을 줄 딸은 한글만 깨우치면 족한 집도 많았다.

애당초 부모로부터 자식명부에서 제외된 딸들...


도회지의 가발공장
, 또는 부잣집 식모로 팔려(?)가서 집안의 대들보인 아들의 학비를 보태야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다고 부모에게 항의하는 딸들은 드물었다. 훗날 누군가의 또 다른 영원한 재산인 아들에게 시집가서 현모양처가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희생을 감수하는 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70년대 초엔 자식 수에 대한 만족치도 줄어들어 아들 둘 딸 하나가 가장 이상적이 되었다. 분석해 보면 여기에도 가부장적인 이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둘을 내가 갖고 하나만 남을 준다는... 그 이기심은 80년대에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고 잘 살기 위한 조건 역시 교육의 단계를 넘어 지식이 힘이라고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집집마다 마치 규격화처럼 자식은 둘이고 딸만 둘이어도 굳이 아들을 낳기 위해 노심초사 하지 않았다
. 자식의 앞날을 위한 교육비의 감당이 아들에 대한 열망을 접게 한 것이다.


90
년대에 접어들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구호가 생겨나고 교육비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 의해 쉽게 동조되었다. 덕분에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러 오로지 나 홀로족인 귀공자 귀공녀가 흔해졌다. 이어서 둘만 낳아 잘 길러진 아들딸들이 부모가 될 시점인 지금은 아예 자녀를 두지 않는 딩크족이라는 신조어의 부부가 생겨나고, 2세보다는 자신의 일에 가치를 더 두는 부부가 늘어났다.


그리고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젊은 여성들에게는 사회진출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아울러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되었다
. 삶을 유지하는 힘이 성별을 초월한 개인의 경쟁력이라 여기고, 행복의 뿌리가 자아실현에 있다고 믿으며, 삶의 활기가 되고 기쁨 주는 것들을 오직 감각적 것에서 찾는 영악한 세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야 말로 그 어떤 제도나 법, 관습을 능가하는 인간으로써의 고귀한 사명이 아닌가 한다. 한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아이를 조금만 낳으라고 구호를 외치더니 이제와선 제발 아이를 낳으라고 온갖 제도를 만드는 것도 어처구니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 남을 사랑하고 눈물 흘리는 능력이야 말로 인간으로써 가장 고유한 영역이거늘, 남아선호사상에 목숨 건 과거는 딸들이 희생양이었고, 성별을 떠나 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잘 살아야 하는 지금은 모든 인간이 물질로부터의 희생양이 되어 있다. 차라리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게 버려두되 서두르지 말고 삶의 자세를 순수한 자연에 접목하도록 계도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어느 시점에 가면 오류투성이 세상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자기답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로 아이를 낳지 않든지
, 반대로 생기는 대로 낳든지 선택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믿음의 근거는 돌고 도는 자연의 법칙과 세상사의 이치에 의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