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강원도장애인종합예술제 글쓰기 부문 최우수상 입상작
아버지의 정원((사)강원도지체장애인협회 평창군지회 김예희)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3-05-23 10:59:57

아버지의 정원

 

()강원도지체장애인협회 평창군지회 김예희

 

읍내로 향하는 둑방 한켠에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어있다. 집 근처가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지나다니는 익숙한 길목이다. 나는 그 길 앞을 지날 때마다 애써 외면하곤 했지만, 눈이 부시게 분홍빛 하얀 꽃무리가 아주 멀리서도 시야에 들어와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야 말았다. 참 좋은 계절이다.


성실함의 대명사였던 우리 아버지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 엄마는 먹지도 못하는 꽃은 심어 뭘 하냐며 타박을 놓는 현실적인 분이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작은 아파트 테라스 가득 화분을 놓고도 모자라 주무시던 안방까지 작은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셨다.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늘 화초 얘기였다
. 누가 꽃을 피웠고 누구는 애지중지했는데 결국 죽이고야 말았다던가. 어느 날은 잠깐 복도에 내놓은 화분을 조화인 줄 알고 지나가던 이웃이 깜짝 놀라더라는 얘길 자랑 삼아 하곤 하셨다. 마무리 인사는 늘 꽃 좀 보러 와라, 얼마나 예쁜가였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엄마와 함께 딸이 사는 평창까지 오셔서 며칠을 머물다 가신 일이 있다. 차로 모시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급히 차를 세우자고 말씀하신 곳이 예의 그 읍내 둑방이었다. 아버지가 꽃 말고도 좋아하신 게 바로 낚시였다. 연로해서 운전을 못 하시니 자식들이 모시고 다니지 않으면 엄두도 못 냈는데 그날은 작정하고 낚싯대를 챙겨 오신 것이다.


그 둑방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돗자리를 깔았다
. 꼭 이맘때였다. 둑길 따라 꽃을 가득 매단 벚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나무 그늘조차 연분홍빛으로 반짝였다. 아버지는 그 나무들 아래에서 허리춤에 양 손을 걸치고 히야하고 감탄을 하며 그 작은 꽃망울들을 올려다보셨다. 팔십도 넘은 노인의 눈이 소녀처럼 빛났었다.

 

물고기가 좀 있는지 본다며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강가로 내려가고, 자칭 평화주의자인 나는 돗자리에 앉아 집에서 싸 온 참외를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꿀벌과 강물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사방이 고요한 봄날 오후였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 둑 아래로 내려갔던 부모님과 남편이 올라왔다.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며 크게 실망한 얼굴들이었다. 자리를 걷어 다시 큰길로 나섰는데 바로 길 건너에 유료 낚시터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버지 저기 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손맛은 봐야지.”


아버지는 아주 잠깐 고민을 하시더니 이내 고개를 크게 저으셨다
.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잠깐의 유희로 누구의 돈이든 헛되게 쓰게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그때 억지로라도 모시고 갔어야 했다. 그 때 모시고 갔더라면 허세 가득 어영차하는 고함을 치며 활짝 웃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 속에 남겨지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시다
. 작년 여름 정말 거짓말처럼 황망하게 돌아셨다. 연로하셨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비교적 건강한 분이셨기에 아무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 둑방 앞길을 지날 때면 후회로 추억으로 또 그리움으로 여전히 마음이 저린다. 아버지가 준 마지막 화분이 생전 아끼시던 치자나무였는데 못난 딸은 그 겨울을 못 지키고 얼려 죽이고야 말았다.

 

아름다운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제 저 하늘나라에서 봄이면 곱은 손으로 묵은 화분의 분갈이를 하고 이 땅을 향해 한 줌 백일홍 꽃씨들을 뿌리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서 이 봄은 슬프지만 또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봄은 내년에도 분명히 올 것이고 그 이후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내내 이어질 것이다
. 벚꽃이 필 무렵이면 난 그 길 앞을 지나며 해드리지 못한 다른 일들을 찾아내며 후회와 자책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보지 않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 모처럼의 낚시를 허탕치고 실망하던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보고 내가 낙심했던 그 날. 아버지가 꽃을 올려다보고 환하게 웃으시던 그 찰나의 미소가 더 크게 자리매김 할 날이 꼭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마음 한켠 제일 작은 반창고 하나를 떼어낼 수 있겠지. 날이 눈부시니 아버지가 더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