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정원
(사)강원도지체장애인협회 평창군지회 김예희
읍내로 향하는 둑방 한켠에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어있다. 집 근처가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지나다니는 익숙한 길목이다. 나는 그 길 앞을 지날 때마다 애써 외면하곤 했지만, 눈이 부시게 분홍빛 하얀 꽃무리가 아주 멀리서도 시야에 들어와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야 말았다. 참 좋은 계절이다.
성실함의 대명사였던 우리 아버지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엄마는 먹지도 못하는 꽃은 심어 뭘 하냐며 타박을 놓는 현실적인 분이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작은 아파트 테라스 가득 화분을 놓고도 모자라 주무시던 안방까지 작은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셨다.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늘 화초 얘기였다. 누가 꽃을 피웠고 누구는 애지중지했는데 결국 죽이고야 말았다던가. 어느 날은 잠깐 복도에 내놓은 화분을 조화인 줄 알고 지나가던 이웃이 깜짝 놀라더라는 얘길 자랑 삼아 하곤 하셨다. 마무리 인사는 늘 ‘꽃 좀 보러 와라, 얼마나 예쁜가’였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엄마와 함께 딸이 사는 평창까지 오셔서 며칠을 머물다 가신 일이 있다. 차로 모시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급히 차를 세우자고 말씀하신 곳이 예의 그 읍내 둑방이었다. 아버지가 꽃 말고도 좋아하신 게 바로 낚시였다. 연로해서 운전을 못 하시니 자식들이 모시고 다니지 않으면 엄두도 못 냈는데 그날은 작정하고 낚싯대를 챙겨 오신 것이다.
그 둑방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돗자리를 깔았다. 꼭 이맘때였다. 둑길 따라 꽃을 가득 매단 벚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나무 그늘조차 연분홍빛으로 반짝였다. 아버지는 그 나무들 아래에서 허리춤에 양 손을 걸치고 ‘히야’ 하고 감탄을 하며 그 작은 꽃망울들을 올려다보셨다. 팔십도 넘은 노인의 눈이 소녀처럼 빛났었다.
물고기가 좀 있는지 본다며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강가로 내려가고, 자칭 평화주의자인 나는 돗자리에 앉아 집에서 싸 온 참외를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꿀벌과 강물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사방이 고요한 봄날 오후였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둑 아래로 내려갔던 부모님과 남편이 올라왔다.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며 크게 실망한 얼굴들이었다. 자리를 걷어 다시 큰길로 나섰는데 바로 길 건너에 유료 낚시터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버지 저기 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손맛은 봐야지.”
아버지는 아주 잠깐 고민을 하시더니 이내 고개를 크게 저으셨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잠깐의 유희로 누구의 돈이든 헛되게 쓰게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그때 억지로라도 모시고 갔어야 했다. 그 때 모시고 갔더라면 허세 가득 ‘어영차’ 하는 고함을 치며 활짝 웃는 아버지 얼굴이 기억 속에 남겨지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시다. 작년 여름 정말 거짓말처럼 황망하게 돌아셨다. 연로하셨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비교적 건강한 분이셨기에 아무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 둑방 앞길을 지날 때면 후회로 추억으로 또 그리움으로 여전히 마음이 저린다. 아버지가 준 마지막 화분이 생전 아끼시던 치자나무였는데 못난 딸은 그 겨울을 못 지키고 얼려 죽이고야 말았다.
아름다운 것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제 저 하늘나라에서 봄이면 곱은 손으로 묵은 화분의 분갈이를 하고 이 땅을 향해 한 줌 백일홍 꽃씨들을 뿌리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서 이 봄은 슬프지만 또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봄은 내년에도 분명히 올 것이고 그 이후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내내 이어질 것이다. 벚꽃이 필 무렵이면 난 그 길 앞을 지나며 해드리지 못한 다른 일들을 찾아내며 후회와 자책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보지 않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모처럼의 낚시를 허탕치고 실망하던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보고 내가 낙심했던 그 날. 아버지가 꽃을 올려다보고 환하게 웃으시던 그 찰나의 미소가 더 크게 자리매김 할 날이 꼭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마음 한켠 제일 작은 반창고 하나를 떼어낼 수 있겠지. 날이 눈부시니 아버지가 더 그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