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공모전’ 수상작 연재-①
최우수상 ‘가로등’

김현동 승인 2023-01-26 15:04:28

한국장애인개발원은 장애아동 가족의 일상적인 양육 부담을 덜어주고, 보호자의 사회활동을 돕기 위해 돌봄서비스, 장애아 돌보미 양성, 휴식지원프로그램을 지원 하는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매년 우수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 공모를 실시,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총 모두 36개 작품을 접수, 심사를 통해 총 8편의 수상작을 선정해 지난달 21일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보고대회 석상에는 시상식을 진행했다.


‘2022
년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 서비스 이용 및 제공 사례수상작 중 최우수상 1, 우수상 2편을 연재한다. 첫 번째는 최우수상 가로등이다.

 

가로등

 

백윤희(대전광역시장애인부모회 소속/ 돌봄서비스 이용)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항상 한 장면에서 기억이 머무릅니다. 14년 전 어느 날 아침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오면 돌쟁이 둘째 아이가 잠에서 깨어 방긋방긋 웃으며 내 품으로 들어와 안깁니다. 사랑스러운 둘째를 안은 나는 무표정으로 옆에 잠들어 있는 4살배기 첫째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깨지 말아라. 하루 종일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그러나 여지없이 첫째는 눈을 뜨고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자폐성장애 진단을 받은 첫째는 그 당시 알 수 없는 요구가 충족이 되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누워 1시간씩 울었습니다.

 

말로 표현을 못하니 행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주차장이든, 병원이든, 마켓이든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장소 상관하지 않고 누워서 울었습니다. 달래도, 협박을 해도, 사탕을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물건을 던지고, 꼬집고, 때리고. 아파트에서는 소문난 아이였고, 동생의 얼굴은 상처로 성할 날이 없었지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살던 동네를 지나갈 때면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낍니다. 그 만큼 힘든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첫째를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둘째를 어린이집에 종일 맡기고, 아침부터 첫째를 데리고 치료실을 다녔습니다. 무지했기에, 그것밖에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둘째는 저녁까지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기다려야했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첫째가 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둘째는 눈치를 봐야했고, 형이 항상 엄마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그때부터 일까요? 둘째만 보면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둘이 갈등이 생기면 말귀를 알아듣는 둘째에게 형의 장애를 설명해주면서 네가 이해하라고 말해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가 7살이던 해에, “엄마,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은 잘 안돼하면서 울먹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사실 은 저도 항상 첫째한테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나도 못 하는 것을 어린아이한테 요구해왔구나!’

 

그때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양육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그 결정은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첫째의 고집을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가 첫째가 더 퇴행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걱정으로 망설이다가 장애아가족 양육지원사업의 돌봄서비스를 알게 되었고 반신반의하며 서비스 신청을 했습니다.

 

장애아 돌보미 선생님이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하신 날, 첫째는 선생님의 승용차에 관심을 보이더니 선뜻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 동안의 걱정은 저만의 기우였습니다. 그날부터 첫째는 돌보미 선생님과 복지관, 치료실들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당연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다정하게 첫째를 부르고, 고집을 피울 때는 기다려주고, 때로는 좋아하는 간식도 사주시면서 아이와 가까워지셨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든 날도 있었지요. 치료실에서 화가 나면 차에 안탄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차안에서 선생님 팔을 잡아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팔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속상해하면 선생님은 오히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첫째가 약속했다면서, 너무 혼내지 말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아이가 그룹 수업을 할 때, 때때로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 날에는 선생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얼마나 잘했는지 말씀해주시면서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어느 날엔 친정엄마처럼 음식을 갖다 주시기도 하고, 동네 언니처럼 서로 자녀 양육 때문에 힘든 일들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저 들어주시고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짧은 말씀을 해주실 뿐이었는데 그것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그렇게 힘든 심정을 말할 수 없었고, 말한 적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했던 심정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같습니다. 선생님과는 첫째 아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고,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선생님의 다정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둘째는 하교를 하면 제가 집에서 맞이할 수가 있었습니다. 둘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둘째가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음식도 먹고, 좋아하는 체험도 같이하면서 그동안 못한 단둘만의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답니다. 둘째 친구 엄마들도 만나 생일 파티에도 참석하면서 동네 친구도 만들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남자아이인 둘째도 4학년쯤 되니 말이 줄어들고 혼자만의 공간을 찾더라구요. 다시 오지 않을 둘째와의 그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와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은 다음을 위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이름으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렸습니다. 마침 장애인부모회에서 동료상담교육생을 모집한다는 홍보물을 보고 신청했습니다.

 

교육을 수료하고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 대상으로 동료상담도 하고, 초중고 학교에서 장애인식개선 강사활동도 했습니다. 차츰 사회활동을 늘려가다가, 지금은 성인장애인들이 직장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무지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첫째 때문에 힘들었던 감정들이 물 탄 듯 옅어졌습니다.

 

저는 동료상담을 할 때 힘들어 하는 엄마들에게 가능하다면 본인의 일을 찾아보라고 권합니다. 일을 하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장애자녀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장애자녀를 키우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돌봄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첫째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돌보미 선생님과는 벌써 7년째 함께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집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어렸을 때처럼 과격한 행동이 아닌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주장도 뚜렷해지고, 나름 자기 행동을 합리화시키기도 하지요. 과거를 생각하면 참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그 여정을 돌보미 선생님과 함께 해 온 셈이지요. 첫째가 힘들게 할 때는 엄마인 나도 괴로운데 선생님은 얼마나 힘들고 난감하셨을지. 힘들다는 표현 한 번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묵묵히 함께 해주신 선생님이 참 감사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나서는 첫째의 뒷모습을 보니 이제 선생님보다 키가 훌쩍 커버렸네요. 선생님 손을 잡고 따라가던 녀석은 이제 선생님 팔짱을 끼고 가고 있습니다. 18세가 되면 돌봄서비스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빨리 활동지원서비스로 전환해야 하는데 아직도 선생님과의 인연을 놓지 못하고 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돌봄서비스는 어두운 길을 힘들게 걷고 있는데 반짝하고 켜진 가로등 같았습니다. 앞으로 가야 하는 길은 여전히 어둡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비추어주는 빛들이 있기에 오늘도 길을 잃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