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21년 제3회 강원도 장애인 생활 수기 공모 작품 - 대상 ①
나 당신 의지해도 될까요? 사랑해도 될까요? / 김순화(강원도시각장애인연합회 원주시지회)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1-18 11:29:19


 

김순화(강원도시각장애인연합회 원주시지회)

 

지난 목요일이었다. 오른쪽 무릎이 안 좋아 러닝머신에서의 걷기를 포기하고 헬스 자전거에 페달을 열심히 돌리고 있는데 회사에 출근한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일요일에 1박 여행갈까?’ ‘어디로요?’ ‘소래포구 어때? 꽃게랑 대하 먹고 오자.’


남편은 알았을까
, 우울해지는 아내의 마음에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각 중증 장애를 가진 난
55살의 장애 여성이다. 비장애인 남편의 아내이고 26, 22살의 두 딸의 엄마 그러고 우리 가족의 하루 세 끼 식사를 책임지는 주부며 경로당 파견 안마 일을 하는 직장여성이다. 타이틀이 많다 보니 힘든 부분도 있지만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도와주는 남편이 있어 지금의 자리에 감사하며 차곡차곡 삶의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포도막염과 망막 색소 변성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력에 문제가 생겨 학업과 일상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 조금씩 좁아지는 시야로 인해 보행에도 체육활동에도 그러고 일상생활에도 힘듦이 컸다. 친구들은 시야가 좁아지고 저시력이 되어가는 나를 1% 부족한 아이로 취급했다. 그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도 생소했고 안경을 쓰면 모두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나의 장애는 친구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시골 살림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진료받는 것도 경제적 부담이 되어 치료의 종지부를 찍었다. 나의 10대는 암울했다. 친구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들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기대감과 긴장으로 새로운 세계에 발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친구들의 평범한 일들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고 사치였다. 그래서 55살이 된 지금도 10대 시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모태신앙이다
. 기억 속 엄마는 매일 철야 기도를 하면서 아픈 손가락인 나를 위해 하나님께 울며 눈 질환을 고쳐 달라고 매달렸다. 나도 그 하나님을 붙들고 시력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달라며 울고 또 울면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단다.’ 엄마의 주문과 같은 이 말이 싫었다. 그래서 난 엄마의 가슴에 대 못 한 개를 박았다. ‘하나님 엿 먹으라고 해.’ 자살 장소를 교회로 한 건 어찌 보면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엄마가 새벽마다 눈물 흘리시며 기도하신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준비해온 과도를 무릎 아래 놓았다. 십자가를 원망스럽게 쏘아보며 왜인가요? 왜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왜 나인가요.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묵혀놨던 원망과 서러움과 분노가 고통이 되어 멍든 가슴을 마구 헤집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 엄마가 보였다. 나처럼 가슴에 커다란 멍 자국이 난 엄마가 슬프게 안타깝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엄마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닌데 난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25, 우연한 기회에 새빛맹인선교원을 알게 되었다. 더는 떨어질 바닥이 없었기에 집을 떠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낯선 곳에 장애가 있는 딸을 두고 돌아서는 엄마의 굽은 뒷모습에서 미안함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엄마, 나 잘 해낼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장애라는 동질감 때문일까, 낯선 곳에서의 적응과 동료 간의 교류는 빨랐다. 흰지팡이 보행법도 익히고 점자의 기초를 배웠다. 6개의 점이 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조금 존재하는 시력은 전맹인 동료를 도울 수 있었다. 식사 후 설거지와 여자 숙소 화장실 청소 봉사를 했다. 늘 도움을 받다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바닥까지 추락했던 자존감이 점차 회복 속도를 높였다. 안마를 배우기 위해 수련원에 입학했고 배움은 일과 연계되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지 않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이 기쁘고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 엄마의 멍든 가슴에 위로가 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새빛맹인선교원청년부 활동에도 참여했다. 구성원은 봉사하기 위해 온 비장애인과 나와 같이 시각장애를 가진 동료였다. 우리의 관계는 봉사자와 이용자가 아닌 또래의 친구였다. 난 그런 구성이 좋아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예배를 마치면 즐겨 가는 분식집에서 순대, 떡볶이, 튀김 등을 시켜 먹으며 그 나이 또래가 할 듯한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 어떤 눈길이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 눈길의 주인공은 청년 예배 시간에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는 장난기 많은 사내였다. 그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의 존재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눈길에 불편함이 컸다. 그 당시 그의 별명은 강 태풍이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내 촉에 가장 거슬린 부분은 청년부 여신도에게 무한한 물주였다. 거리낌 없이 말하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스킨쉽 역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었다. 강 대남 그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바람둥이였다.


청년 예배를 마치고 우린 더위를 시킬 겸 한강으로 오리배를 타기 위해 나섰다
. 그런데 바람둥이로 찍힌 그가 내 안내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현했지만 한 사람에게 한 명 안내자가 붙어야 하는 원칙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우리의 연결고리는 시작되었고 그 후부터 그는 내 전담 안내자가 되었다. 그와의 연속적 만남은 그에게 가졌던 선입견을 깨뜨렸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