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3주년 기념 장애인 및 가족 문학작품] 조선옥-다시 꿈꾸는 호야 엄마의 행복 이야기
(장려상/수필/원주)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1-01-26 11:21:59



오래 전, 오늘처럼 찬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날, 고열에 시달리는 아들을 데리고 며칠 동안 병원에 다니느라 지친 나는 약기운에 잠이 든 아이 곁에서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잠에서 깨어보니 힘없이 나를 바라보던 6살 된 아들은 가녀린 목소리로 엄마!”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들의 목소리는 22년 전 멀고 먼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아직도 가끔 나는 행여 아들의 목소리를 아주 잊어버리게 될까 염려되어 이제는 아련해진 아들의 어릴 적 목소리를 되뇌며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 보고는 합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면, 친구야 이리 와, 우산이 되어줄게.......”


아들이 입원한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해 당황해하며 여러 종류의 검사와 처방을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넘도록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아들을 지켜보는 저와 가족들은 너무나 큰 슬픔과 절망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 결국 저희 가족은 더 우수한 의료진과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서울의 대형병원에 아이의 치료를 맡기기로 결정하였고 어렵사리 신촌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병상을 확보하고는 각종 의료기기에 가녀린 아들의 목숨을 의지한 채 서울로 떠났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숨 가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울 병원으로 내달리던 차 안에서 저는 의식 없는 아들의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엄마랑 같이, 우리 꼭 같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 호야!’


그리고 눈물과 간절한 기도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석 달 후 어느 날
, 마침내 아들은 신종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뇌 손상이라는 병명 아래 길고도 길었던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40% 이상의 뇌 손상을 입어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운동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그러한 사실을 접한 저와 우리 가족은 크나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 마음을 굳게 먹고 하루라도 빨리 아들의 건강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오직 아들의 재활만을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 마침내 저는 1년여에 걸친 병원 생활을 끝내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이 야윈 아들이 중증 환자를 위한 휠체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제 물건들로 가득 찬 집안을 낯선 눈빛으로 바라다보던 그날의 그의 모습을 아직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난 후 우리 가족은 아들의 재활 치료를 위하여 한방
, 양방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유명한 병원을 찾아다녔으며 심지어는 무속인까지 만나는 등 그때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어쩌면 아들의 장애를 모두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극심한 우울감과 대인기피증을 겪으며 피폐해진 심신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아들의 치료와 가정생활 또한 온전할 리 없었고 이렇게 기막힌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라는 원망 섞인 한탄과 함께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비난하며 자포자기한 삶을 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런 나를 다독이며 위로하다 지칠 만큼 지쳐가던 남편이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아들의 건강할 때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들고 제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호야 엄마, 이제 여기 있는 호야 모습은 잊자! 우리에게는 지금의 호야밖에 없었던 거야. 호야를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너무 애쓰며 가슴 아파하지 말고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다시 건강해질 수 있도록 함께 최선을 다해 보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마음을 다잡고 아들의 치료를 위하여 다시 병원을 찾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매일 밤늦게까지 맨발로 걷는 연습을 한 결과 병원에서 퇴원한 지 1년여 만에 마침내 아들은 불안정하나마 스스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미련 없이 휠체어를 병원에 기부하고 그 후로도 꾸준히 병원 치료와 운동을 하며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아들이 입학한 학교에는 지금처럼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활동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저는 아들을 교실에 데려다 놓고 난 후 쉬는 시간마다 교실로 가서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아들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다음 수업 준비를 하였고 점심시간이면 유동식을 먹어야 하는 아들을 좁은 차에 누이고 준비해 간 죽을 먹였습니다
. 병약한 몸으로 힘들게 학교생활을 하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저는 잠시도 제 몸이 편히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수업이 끝나면 반 아이들과 함께 교실 청소를 하였고 학교 곳곳의 쓰레기를 치웠으며 해마다 가을이 되면 교정의 낙엽들을 쓸고 겨울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치우곤 하였습니다.


아들과 저는 항상 성실히 학교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 우리는 매년 운동회 달리기에 참여하여 비록 꼴찌였지만 둘이 손을 잡고 끝까지 달려서 결승선의 테이프를 끊으며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도 하였고 학교 소풍과 현장학습 때에는 챙겨간 간식을 반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23일의 졸업여행 때에 아들은 저와 선생님 등에 업혀 경주 여러 곳을 여행하며 친구들과 잊을 수 없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일반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교실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챙기는 나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고 저는 아들에게 더욱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오랫동안 고심해 오던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습니다
. 그리고 드디어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저는 죄송하고 염치없는 마음으로 여든이 다 되신 연로하신 부모님께 아픈 아들을 부탁드리고 계획했던 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외롭고 고된 타국 생활이었지만 저는 아들을 생각하며 공부에 매진하였고 돌아와 시험에 합격한 뒤 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렵게 합격한 일반 고등학교의 학교 일정을 소화하는데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아들은 자퇴를 한 뒤 저와 함께 주말마다 방송통신 고등학교를 다녔고
3년 동안 성실히 학업에 힘쓴 결과 졸업식에서는 교육감님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뒤 지금은 강원도 지체장애인 협회 원주시 지회에서 직원 분들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 속에 행정 보조 업무를 성실히 하며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은 자신의 이상형 여자 친구에 대해 설명을 하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28살 청년이 되었고 30대 초반의 젊은 새댁이었던 저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새 눈가에 주름 가득한 50대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장애로 인하여 나의 아이가 감당해야 했던 편견과 불이익에 가슴 아파했고 경기를 하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는 날에는 삶이 참 슬프고 버겁게만 느껴졌습니다
.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픈 아들의 수족이 되어 그와 한 몸같이 살아냈던 그 지난날들이 꼭 서럽고 고단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동정 어린 마음으로 가끔씩 작은 도움을 주고 있음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무심히 지나쳤을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장애로 인하여 장애를 지니신 많은 다른 분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고 계시는 그분들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응원하게 되었으며 저 또한 그분들로부터 힘을 얻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는 아들과 함께 하는 제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소소한 일상에도 기뻐하고 감사해하는 삶을 살고자 더욱 노력하게 되었고 그 시간들 속에서 아들은 겸손과 배려를 아는 선한 청년으로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그동안 아들을 염려하며 격려와 용기 그리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조부모님으로부터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 친절한 이웃분들, 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성심으로 아들을 돌봐주시는 지금의 사회복지사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매섭게 휘몰아치던 폭풍 속을 지나 이제 저는 눈물 없이도 이 세상의 역경을 이겨낼 자신이 있을 만큼 단단해졌습니다
. 비록 우리네 삶의 모습이 각기 다 다를지라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삶은 충분히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앞으로도 저는 아들이 이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써 자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정을 꾸리고 제 식구들과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때쯤이면 그때까지도 아들의 손을 꼭 쥐고 한없이 혹독하고 냉정하게 제 자신을 채찍질하며 이 세상을 달려왔을 저에게 지난날 다른 분들로부터 눈물로 받았던 장한 어머니상을 주려고 합니다. 배낭을 메고 홀로 떠난 여행에서 어느 날 문득 발길이 닿은 그 어딘가에 조금은 힘에 부치는 짐을 내려놓고 이렇게 나지막이 제게 속삭이며 말입니다. ‘행복해 보이시네요. 최선을 다하신 호야 어머니,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