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각장애인이어서 회장님이라고 들을 수 있었다. (원충의/시각/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강원도지부 강릉시지회)
제2회 강원도 장애인 생활 수기 공모전 특별상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19-07-02 11:58:40

어느 날 나의 뇌를 스쳐가는 단어 들이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셋이 되더니 저만치 까마득한 그 옛날 이야기들이 올해 83(85)가 되어버린 나는 나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시절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나의 이름보다 더 앞에 붙는 수식어』 『그 이름은 시각장애인남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에게 있어 시각장애인 원충의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참으로 행운이 많은 사람이였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보다 더 앞에 분신처럼 따라 다녔던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값진 수식어시각장애인그 수식어가 있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였다. 그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6.25사변이후 1953년 그 당시 나의 나이는 18. 폭발물 사고로 인해 실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젊의 청년의 패기와 용기로 정치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하루 아침에 정상인에서 장애인으로

또 그것도 두 눈을 볼 수 없다라는 현실 앞에 나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7번의 눈 수술을 받았으며, 수많은 고뇌와 시름(자살 등)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나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고 나의 두 눈은 의사들의 시험도구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은 나의 비싼 수술비로 인하여 농사짓던 땅 들이 하나. 둘 없어져 가세가 기울어졌고, 나에게 남은 것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수식어와 집안을 망하게 한 무거운 짐이 하나 더 생겼다.

그 당시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시각장애인들이 글로 읽을 수 있는 점자를 터득해야만 했다. 나는 부모님께서 거내주신 보리쌀 5말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나의 머리는 장발이 되었고, 10개의 손가락의 손톱은 피가 나고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나는 점자습득을 하여 드디어 점자로 책을 읽을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제2의 인생이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누군가가 시각장애인의 계몽활동을 해야만 한다면 내가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956년 현 명진학교(전 춘천맹인학원) 외교교사를 맡으면서. 그때부터 나의 이름 앞에는 정상인에서 시각장애인 사람들의 놀림과 멸시와 따돌림만 매섭게 몰아쳐 왔다. 횡성에서 태어나서 횡성, 춘천등지에서 학교생활을 한 나는 고향을 등지고 1958년 흰지팡이를 짚고 부인(임병옥씨)과 대관령 굽이굽이를 걸어서 강릉시 노암동 산116 번지에 맹인학원을 신축하여 교육혜택을 받지 못하는 영동지구 시각장애인들을 무료로 교육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 결과 1976년까지 졸업생 약 270명을 배출하였으며. 강원도 맹인교육 기관이 운영상 어려움이 발생되어 춘천으로 통합되면서 당시 강릉맹인학교 재학생들을 춘천에 있는 현 명진학교로 입학시켜 점자 터득을 이어가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던 중 슬하에 14녀를 두었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장남을 육군대위로 제대시켜, 현재 강릉시 공무원(사무관)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4녀는 모두 분가시켜 나라에 일꾼(공무원/공기업 등)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다복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맏손자도 육군 중위로 제대하여 현 농협 공기업에 근무하게 되어 더욱 기쁘다.

그러면서도 시각장애인들에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들의 생계가 여전히 걱정되어서 강릉에 안마시술원을 설립하여 강릉시 시각장애인들이 생계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당시 통행금지로 인한 밤 12시 이후의 영업행위의 불가능성을 관계기관에 수차례 진정하며 안마사는 새벽 3시까지 시내를 통행할 수 있게 하였고, 안마, 지압 및 물리치료로 의료사업을 활성화시켜 어려운 환자 및 일반인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강릉시 일반인중 고혈압 질환으로 중풍환자가 된 사람을 시각장애인이 고쳤다.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보람을 느끼며 내 삶의 자부심으로 다시 한 번 다졌다.

 

또한 내가 살던 보금자리는 강릉에서도 아주 외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전기공급과 통신이 지원되지 않아 지역주민과 시각장애인들의 귀로 듣는 정보력까지 상실하게 되어 관계 관청에 매일 한 달 정도 찾아갔던 것 같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꽤 귀찮은 모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나한테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우리 동네에는 고압 전주 9개와 일반 전주 6개가 설치 될 수 있어 주민들의 생활이 훨씬 편리해졌다.

또한 내가 사는 노암동은 시내와 떨어져 있어 응급환자 발생 시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불편도 전화선이 들어오면서 더욱 생활이 편리하게 되니까, 동네 주민들이 시각장애인 원충의씨에서 시각장애인 원충의 선생님으로 호칭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 동네사람들한테 선생님이라고 들으면서 나는 이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다.

그 때 내 텅 빈 마음이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내 마음속에 이번에는 동네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생각해 보니까 꽤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우선 동네주민과 협동하여 채소를 재배해서 공동으로 판매하고 우리동네 주변에 꽃나무를 심고 동물들의 퇴비를 이용하여 유휴지에 복숭아, 자두, 밤나무 등 과수조성을 하여 수입도 올리고 동네 지형을 이용하여 산 계단식 밭을 일구어 약3,500평의 밭에 뽕나무를 식수하여 춘추로 양잠을 사육하였다. 그랬더니 어느 날 따르릉 한통의 전화 강릉시에서 나에게 표창장을 준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왜? 저를 주세요? 했더니 타 양잠업자에게 모범이 되어 강릉시장님의 표창장과 강원도지사의 표창까지 준다는 것이 아닌가.

 

나의 집은 맹인학원 안에 있는 터라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 즉 험한 곳에 있었다.

어느새 마을 주민들이 한 두명 모여들더니, 우리 학원 운동장에 어느새 주민들이 가득 모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시각장애인 원충의 선생님에서 맹인학원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이였다. 지금도 가끔씩 나는 현 강남동에 설립된 현 남부(당시 오성새마을금고) 새마을 금고를 찾는다. 당시 내가 거주하던 맹인학원 식당에서 마을금고를 발기한 한 사람으로 이사, 부이사장을 거쳐 이사를 17년간 역임한 추억 때문인지 발걸음이 종종 그곳을 향하곤 한다.

 

또 어느 날은 내가 주례선생님이 되어 강릉시각장애인 미혼자 6쌍을 연결하여 주례를 서고 성혼시켜 다복한 가정을 이루게 해주었으며, 시각장애인 무주택 2세대를 블록조 스레트 가옥(11) 2채를 각 세대별로 모금활동을 걷처 1987~1989년 까지 2세대를 신축하여 각 세대에 기증하여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1999년 강릉시 장애인 교통이동의 불편함을 위해 장애인생활이동지원센터를 보건복지부로 유치, 개소하여 이동에 제약이 있는 장애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강릉시 장애인 총 연합회(5개단체 소속)를 구성하여 1대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14년간 회장을 역임 하면서,강릉동인종합병원과 협약하여 (시각, 농아, 지체, 신체, 지적)10,000여명 장애인들에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급되는 의료비 외에 지급되지 않는 의료비에 대하여 강릉시 장애인 및 가족들에게 진료비 10%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2001년부터 2017년까지 강릉시 장애인 다솜합창단을 구성하여 강원 장애인 하나되기 합창경연대회에 참가해 2018년 대상수상 까지 총 7회 수상경력도 가졌고, 20167월 강릉시 장애인 단체들의 통일성과 단합심을 위하여 사단법인 강릉시장애인법인단체연합회 설립을 추진하여 ()강릉시장애인총연합회(5개단체) 비법인을 ()강릉시장애인법인단체연합회(소속 11개 단체)로 법인설립(2016.12.22)을 하여 강릉시 장애인 단체들의 융화, 화합 단결 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도 하였다.

시각장애 1급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장애인 편의시설촉진요원으로 선정되어 강원도내에 장애인들의 편의시설 설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식당, 회사, 관공서 등 각 분야별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에 미비한 점이 있으면 시정요구 하는 등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자신보다 타장애인이 먼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수식어는 시각장애인 원충의 회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재벌의 총수도, 기업의 회장도 부럽지 않았다.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에게는 삶의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강릉시각장애인지회는 2000년 콘테이너 박스 1개동으로 시작하여 20027개동이 되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2개 동을 유실하여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일해왔다. 그런 어려움을 고려하여 200310월에 지상 2층 건물을 신축 강릉시에 기부체납하였고 강릉시에서는 강릉시각장애인들을 복지발전을 위하여 본 건물을 무상 임대해 줌으로써 시각장애인 복지증진에 한층 더 이바지 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내 생애 잊어지지 않은 일 한 가지 우리나라 그것도 내가 사는 강릉에서 동계 패럴림픽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홍보 대사로 스마일 강릉 실천협의회 화합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릉시 및 강원도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을 더 나아가 강원도 강릉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충실히 다 하였다.

그러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내가 홍보대사의 역할을 차근차근 내 머리 속에 나열해 보았다.

 

201176일 국제올림픽에서 제23회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대한민국 평창으로 발표함에 따라 대한민국은 축제의 장이 되었고, 이어 동계올림픽 종목 중 빙상경기(5개 종목)를 강릉에서 개최함에 따라 2018년 스마일 강릉실천협의회 화합분과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강릉시 및 강원도 더 나아가 전국대회까지 장애의 벽을 넘어 2018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를 몸소 실천하는 미덕을 보여 강릉시장으로부터 2015년 감사패를 받았다.

 

전국시각장애인 안마사 생존권 보호를 위한 결정이 20171228헌법재판소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자격을 부여하는 의료법이 통과하였고, 이에 탄원서 제출에 있어 강릉시 관내 유관기관 및 강릉시내 거리 캠페인을 통한 탄원서 서명 활동으로, 전국 시각장애인중 2,430건으로 최다 서명을 받아 제출하여 강릉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뿐 만 아니라 전국의 시각장애인 생존권 보호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나는 나 자신이 불구의 몸임에도 한 평생을 장애인복지발전, 의료복지 및 지역사회 복지발전을 위해 앞장서서 몸소 실천하고 봉사해 나 자신의 장애가 단점이나, 벽이 아닌, 하나의 장점으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몸이 조금 불편하지만 결코 다른 사람과 틀린 게 없다.이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강원도민이며, 강릉시민 또한 한 가정을 이끌어낸 휼륭한 아버지였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문득 나의 삶을 되돌아 세월이 이만큼 흘러 나의 인생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회상에 잠시 빠져들었다. 나는 나에게 넌 시각장애인이여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었고 나는 시각장애인이여서 남들 들어보지 못하는 회장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 모든 원동력은 나를 믿어주고 따라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과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또한 내가 이글을 쓸 수 있는 건 이제 나에게 스스로 말 할 수 있어서 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눈 멀고, 입 닫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 스스로 실천 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난 내가 시각장애인이여서 가장 행복한 생을 살아왔고. 그동안 수고많이 했다고 그 동안 정말 정말 잘했다고 이 세상의 끝자락에서 살면서 박수를 보내며 펜을 놓으려 한다.

 

나는 이미 시각장애인 1급이 되어버려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직도 살아갈 만 한 세상이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