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팔은 나의 팔, 나의 다리는 그녀의 다리(연현우/뇌병변/아우름자립생활센터)
제2회 강원도 장애인 생활 수기 공모전 장려상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19-06-04 10:48:37



저는 뇌병변장애 1급이며, 속초에서 자립 생활과 더불어 꿈같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제가 태어날 무렵, 저희 어머니께서 주무시다가 연탄가스를 마시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병원에서는 태아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어머니는 저를 포기하시지 않고 저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애를 비관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


저는
10살이 넘도록 걷지 못해서 학교에 다니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TV와 일일 학습지 등을 통해 한글을 독학으로 읽고, 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구열이 남달랐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의 다리 운동을 시키기 위해 세발자전거를 태웠습니다
.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일도 많았고 몸에 상처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힘이 생겨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며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저는 17살이 되던 해에 큰이모의 권유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강릉(오성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6개월 후, 또다시 담임선생님께서 여기보단 경기도에 위치한 특수학교 안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정규교육을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말씀에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부모님 곁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 먼저 들었고 겁도 많이 났습니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한편으로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혼자 그 학교에 가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중학교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학업에 진도가 나가질 못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받은 저는 누구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중3 , 성적이 중, 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또다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 특수학교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많아서 서로 이해를 해주고 서로 도와주며 생활을 했는데 대학 생활은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이 너무 아까워서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군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하고 대학 생활은 생각대로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 필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식사를 혼자 먹기가 어려움이 있어서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끙끙 앓고 있던 어느 날, 과사에서 학업 도우미를 구해주겠다는 연락이 와서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학업 도우미 덕분에 학업에 집중을 할 수 있었고 식사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라서 금방 친해졌고 그 친구와 같이 놀러도 다니면서 추억을 쌓았습니다
.


4
학년이 되자 실습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방학 동안 속초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속초에서 실습할 기관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저와 같은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은 실습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행히 금강장애인주간보호소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실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받았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집에만 있어야만 했습니다
. 그러던 중 금강장애인주간보호소 소장님이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기간제로 일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하는 맘으로 일을 시작했고 6개월 동안 사무 보조일을 했습니다. 기간제라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기간 만료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저는 또다시 집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2013
, 여름에 아는 지인이 장애인 인권 활동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아우름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인권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인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고 내가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동을 하면서 영상 미디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조금씩 영상에 대한 재미를 느꼈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어려움을 영상으로 통해 비장애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인식 개선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장애인인권영화제를 통해 영화를 찍게 되었고, 몇 번에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센터에서 활동을 하던 중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지금의 아내와는 센터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습니다
.


저의 아내도 중증장애인 당사자라서 저의 장애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를 해주었습니다
. 점점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연애는 시작됐고, 점차 서로의 감정이 깊어지면서 결혼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양가 부모님들은 반대가 심했고,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비장애인들보다 많이 힘들 것이라고 하시면서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아내는 여러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를 무릎 쓰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내의 팔은 저의 팔이 되어주었고, 저의 다리는 아내의 다리가 되어주며 지금은 어떤 부부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중증장애인 당사자도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 비장애인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통해 저의 경험들을 적어봅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그녀의 팔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