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복지단상] 나를 재는 커다란 사랑의 잣대를 갖자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18-07-03 10:26:43


▲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어느 50대 후반 여성장애인의 이야기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남부럽지 않게 성장한 두 아들을 둔 그녀는 늘 당당했었다
. 그러나 수년 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몇 달 동안 생사를 넘나든 후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우측 팔과 다리, 어눌한 말 때문에 애를 태우며 주변과 서서히 담을 쌓아갔다. 그리고 신체의 잔존기능을 유지하고자 지팡이에 의지해 아파트 옆 산책로를 걷는 것이 유일한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파트 주변에는 가끔 나타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중년여자가 있었다. 주민들은 계절에 맞지 않는 때 묻은 옷차림을 하고 중얼거리며 웃기도 하는 그를 가난한 지적장애인 또는 정신질환자로 추측하면서 가엽게 여기고는 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 중년여자가 쓰레기통에서 주운 빵을 벤치에 앉아 있는 여성장애인에게 다가와 내밀면서 쯧쯧쯧 동정의 혀를 차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는 뜨거운 수치심으로 가슴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내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저런 행려병자 눈에도 불쌍하게 볼일까?’ 서둘러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으며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외출이 싫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초라한 자신이 싫어서 가끔 자살충동이 인다고 했다. 실제로 장애인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요인은 불완전한 몸보다 남들의 시선이기에 이해가 간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내가 만일 그 여성장애인이라면 어찌했을까? 그녀처럼 눈물을 보이고 지팡이를 끌면서 절뚝절뚝 돌아섰을까? 아니면 어눌한 소리로 나는 부잣집 안주인이니 당신이나 드세요.’ 화를 내거나 차갑게 무시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불쌍해 보이는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다니.’하고 감동했을까?

 

인간은 만사를 자기 견해로 판단한다. 그 판단기준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 고상한 것보다는 야비한 것, 참된 것보다 간사한 것, 내 책임보다는 남에게 핑계를 대는 것 등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본능은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세계를 누비고 인맥이 넓어도 벗어날 수 없다. 즉 삶의 본 모습은 원래 비속하다. 때문에 인간사의 오류를 줄이고 균형을 유지하고자 정의, 평등, 존엄성을 이념으로 한 법이 존재해왔다. 덕분에 너와 나, 집단과 집단 사이의 질서가 유지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여성장애인처럼 지독한 자기연민의 견해로 스스로에게 입힌 상처는 어찌 회복할 것인가
? 다시 말해 행려병자의 견해에 자기모습을 재단함으로서 쪼그라든 마음상태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이러한 오류를 줄이는 방안은 긍정적 자기수용 에너지를 촉진하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오직 살아 있음을 감사할 때 생성되며 나를 재는 사랑의 잣대로 자라난다.


올해 강원연구원에서 발행한 통계핸드북을 보니 강원도민의 자살률이 32.2%로 전국 평균 26.74%(2016년 현재)보다 높았다. 어떤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모두가 아픔들을 넘어서지 못한 결과다. 이참에 슬픈 마음 있는 모두에게 스스로를 재는 사랑의 잣대가 커다랗게 자리하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어차피 남의 이야기로 가득 한 세상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절망하는 이도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