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감동상)
[강원도 장애인 자립생활 수기 수상작 소개 ④] 권용준(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강원도지부 횡성군지회)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18-12-11 14:06:37


▲ 권용준(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강원도지부 횡성군지회)


 

1986년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가 되었고 1년 후 아들 정현이가 예쁘게 태어났다. 가난한 집 여섯째로 태어나 험난한 인생길을 걸으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1998
년 횡성 범산목장으로 근무지를 이직하면서 대형젖소목장에서 관리부장으로 목장을 운영하면서 10년간의 세월 동안 강원도내 젖소농가들의 전설이 되었고 줄기세포 황우석 박사가 인정 할 정도로 가축관리에 인정을 받았다.


2004
년 우유 파동과 원유쿼터제 실시로 목장이 위기를 맞을 때 나는 틈새시장인 유기농으로 과감하게 도전을 감행하였고 2005년 유기농으로 전환을 하면서 목장형 유가공 공장을 건립하고 20061월 유기농 유제품을 출시하게 되었다.

 

이후 목장위에 골프장이 생기면서 범산목장을 이전하게 되어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에 터를 잡고 20077월까지 이전을 해야만 했기에 토목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71월부터 나는 작업을 진두지휘 하면서 벌목, 소나무 이전작업, 토목 공사등을 하면서 극심한 추위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고 목장의 일도 겸해서 해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피로가 쌓여 있었다.

 

200732일 유기인증 및 인부들의 급여 및 결산을 위해 목장에 왔을 때 아내는 얼굴색이 좋지 않다며 어디 아프냐 물었다.


나는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


다음날 새벽 자재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다시 현장으로 가야만 했다
.


그런데 너무 두통이 심해 도저히 갈 수가 없다
.


좀 쉬었다 가겠다하여 아내는
23시경 깨워 줄 테니 쉬라고 했고 저녁식사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온몸이 굳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아내는 너무 놀라 옷핀으로 손과 발끝에서 피를 뽑았더니 의식이 돌아오면서 구토를 시작했고 극심한 두통을 호소했다
.

 

아내는 응급조치를 하고 119에 신고하고 원주 기독병원응급실에 도착해서 검사했더니 뇌지주막하출혈이였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뇌에 피가 고이기 시작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하였다
.


앞이 캄캄했다
.

 

아침 7시 용산중앙대병원으로 이송되어 10시 수술실로 들어갔고 5시간30분 동안 대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이동되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다
.

 

회복되기만 기다려야 했고 수술 다음날 의식이 돌아왔고 머리에는 수십개의 핀으로 두개골을 연결해 두었다.


15
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준중환자실에 올라왔다.

 

주치의 말씀! 혈관수축이 올 수 있으며 반신을 사용할 수 없을 수 있고 생명이 위험할 수 있으니 잘 확인하라 했다 한다. 낮에는 아들이 아빠 병간호하고 밤에는 아내가 병간호했다. 준중환자실 올라 온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 나의 몸에 이상 신호가 발생했다.

    

우려했던 혈관수축이 온 것이다. 긴급으로 수술에 들어갔고 다시 중환자실에서 죽음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열, 위출혈, 폐에 물이 차면서 합병증이 온 것이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 했다.

 

물을 먹을 수가 없어서 혀는 가뭄에 심하게 파인 논바닥처럼 갈라져 각질이 벗겨져 있었다.


고열로 인하여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에 중요 부분만 수건으로 덮어놓고 오른팔과 다리는 난간에 묶여지고 왼쪽으로 편마비가 시작되어 움직일 수가 없고 머리에는
5개의 바늘이 꽂혀있고 가슴에 7개의 바늘이 꽂혀있었다.

 

꿈 속을 헤 메고 있는 듯 했다.


죽음의 시간이었으리라
...

  
아내는 매일 횡성에서 용산까지 20분 면회시간에 맞추어 도착했고 비몽사몽간에 아내를 보면 살고 싶단 생각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랐다.

 

아내가 중환자실 면회 오면 20분 동안 두 손발 다 풀어 주어 조금이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절대 주사바늘을 뽑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어 주었다.

 

아내가 면회시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아내는 다시 손발을 침대 난간에 묶어주고 나갔다 다음 날 저녁 면회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힘든 이 시간이 지나면 일어날 수 있겠지 마음먹었다.

 

13일째 중환자실에서 조금 회복이 되어 15일째 병실로 올라오게 되었다.


주치의가 하는 말
! 몸을 가늘 수 없으니 앞으로 걸을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에어매트 준비하라고 하였다. 야속하였다.

 

왼쪽 편마비로 혼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왼쪽팔과 다리가 꼬이고 등에 깔려 혈액이 통하지 않아 시커멓게 되어도 나는 감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 걷고 싶고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일주일 후부터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으며 3주 후부터는 난간을 잡고 걷기를 시도했다.


주치의도 놀랐고 모도 놀랐다 눈물이 앞을 가렸고 아내와 아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어가고 시야가 잘 안 보였다. 뿌옇게 보이고 왼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과 검사의뢰 했더니 반맹이란다.

 

정확한 진단은 원주기독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고 두 달째 되었을까? 주치의 선생님 하신 말씀, 머리 혈관이 정상인과 조금 다르다고 했다.

 

혈관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어 자칫 간질을 일으킬 수 있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진 듯했다
.


서울삼성병원으로 가보라고 소견서와
CD를 주셨고 아내는 삼성병원 뇌혈관센터 이정길 의사선생님과 면담결과 비수술인 감마나이프로 혈관을 풀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두 달 동안 죽음의 기로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 용산중앙대병원 생활을 뒤로하고 삼성병원으로 이동하였다. 저녁부터 감마나이프를 위해 사각물체를 고정하기 위해 머리양옆에 핀을 고정하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 시간은 차라리 생을 마감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고통스러웠다.

 

참아야 했다.


5
68시간의 시술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왔고 휴식을 취했다.


5
7일 우린 퇴원해서 집으로 오는 날 나는 너무 좋아 가슴이 벅차올라 심장이 터질 듯했다. 아내는 혈관 수치를 올려두었기 때문에 흥분하면 안 된다고 진정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상지대 한방병원에 입원하여 1년간의 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많이 걷고 또 걸었다.


한 쪽만 보이지 않는 반맹이 아니고 오른쪽
, 왼쪽 눈에서 왼쪽으로 반반씩 보이지 않는다.


가로수와 부딪히고 사람과 부딪히고 건물에 부딪치고 넘어지고 왼쪽 팔은 전혀 사용 할 수 없고 다리는 끌고 다니다 보니 넘어지기 일쑤였다
.


그래도 걸어야 한다
.

 

원주기독병원 안과 검사 하는 날 한 가닥 희망을 안고 검사결과를 듣는 순간 절망이다. 담당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평생 시신경 손상으로 왼쪽을 볼 수 없으며 시력을 다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을 나의 면전에서 그대로 말을 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 희망이 0.0001%도 없다 하네...

 

아내는 절망하지 말고 한쪽 눈으로 보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였다. 전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으니 한쪽만 보는 것 만 으로도 감사하며 살라고 하였다.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보라 했다
.


그렇다 이대로 포기 할 수 없다
.


덤으로 사는 소중한 제
2의 인생이니 하루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산을 오르면 다리 힘이 생긴다 하여 열심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나와의 싸움이었다. 넘어지고 깨지고 온통 상처투성이에다 발톱은 두 세번 빠져서 새로 나고 피멍이 들었다. 이후 시각협회 회원으로 지내다 장애인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면서 자전거 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21012일 의정부 장애인 전국체전에 출전하였고 그날 아들 정현이는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 보내고 가슴속 깊숙이 묻었다.


이 후 아들이 그리울 때는 자전거 폐달을 밟았고 산을 올랐다
.


의미 없는 하루하루 보내는 게 너무 싫어 아내와 상의 후 목장을 하기로 하였다
.


아내의 걱정을 뒤로하고 토지를 구매하여 축사를 짓고 한우를 입식했다
.

 

전원생활 하면서 공기가 좋아서 인지 조금씩 건강도 더 좋아지고 고생한다며 아내가 운전 할 테니 트랙터 구입하자고 했다.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소를 너무 잘 길러서 판매도 하고 직접 송아지 분만도 시작했다.


아내가 고맙다
.


나도 조금이나마 할 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


더 나빠지지 않고 지금처럼만 살았으면 좋겠다
.


육체가 조금 불편한 것은 장애가 아니다 불편하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 하는 게 중증 장애다
.

 

아내는 늘 나를 인간 승리자라 한다.


여보 당신은 내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요
, 희망이요.


내 다리가 되어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곁에 있어주시오
.


사랑한다는 말로도 보상이 되지 않지만 항상 늘 감사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