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아름다운 동행 이야기(우수상)
[강원도 장애인 자립생활수기 수상작 소개 ③] 김은숙(정신3급)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18-11-28 11:14:43


▲ 김은숙 씨 부부의 모습.


1998,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삼성생명 보험() 여사원 공채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20대의 시작은 대학생이 아닌 사회 초년생으로 사회에 먼저 딛게 되었습니다. 거주지가 강원도 도계였기 때문에, 도계를 비롯해서, 태백, 삼척, 동해, 강릉, 원주 등을 발령을 받아가며 쌓여가는 업무와 설계사 관리 고객관리 등을 하면서 바쁘게 쉴 틈도 없이 20대 초반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찬란한 저의 20대의 중반 무렵, 저에게 꽃길만 걸으리라고 생각했고 아픔이 올 것을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욕심과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지라, 뭐든 열심히 하고 결과물을 내야했고, 공부에도 의욕과 성취목표가 생겼던지라 원주에서 야간으로 상지영서 대학교를 졸업까지 무사히 마치고, 편입을 하기 위해 상지대학교로 원서를 접수했던 그 해 겨울, 업무도중에 갑자기 오열과 함께 눈을 뜨지도 못하고 안정을 찾지도 못한 채 업무 마감처리도 하지 못하고 저에게 이상 증세가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떨리고 망상에 빠져서 겁에 잔뜩 질려하며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자꾸 사이비관련 말만 하고 펑펑 울기만 하면서 저의 병의 발병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업무에 지치고 저의 삶에 여유 없이 달려온 지라 너무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의 인생을 바꿔 놓을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바로 퇴근을 함과 동시에 고향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밤차를 타시고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 도계에서 원주행 기차를 밤에 타고 오시면서 전화한통을 회사에서 받고 얼마나 걱정을 하시면서 오셨을까요? 날씨도 엄청 추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혼자 거주하는 원룸으로 오셔서 저를 데리고 다시 바로 밤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는 도중에도 저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고 망상에 빠져 사이비관련 모든 사람이 저를 주시하고 있고, 겁에 질려 통제하기 힘든 저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강릉아산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바로 정신의학과 원장님과 예약을 맞춰 하룻밤을 집에서 뜬 눈으로 보낸 후 병원을 찾게 된 게 제 진료의 시작입니다. 제 기억에는 너무나도 편했기에 잠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폐쇄병동에 1달 반을 입원해 진료를 받았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에 취해 집중력이나 기억력 등 모든 판단능력이 떨어졌고, 제 병명이 궁금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조울증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2004년 첫 발병 후 2018년 지금까지 2달에 한번 약 처방 및 전문의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양극성 장애라고 부르는 조울증 치료를 받는 환자인 동시에 2010년 아이를 낳고 약을 잠시 끊고 호전증상이 보여 병원도 다니지 않았는데 산후우울증과 동시에 조울증 재발이 오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같이 제게 두 번째 아픔이 동시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일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직장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3번째 재발, 2013년 겨울, 한전에 장애인인턴으로 취직이 되어 근무하던 중 망상과 환청 등 이상증상이 점점 강하게 저에게 왔고, 한번 재발할 때마다 은둔생활을 하고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2~3년은 약에만 의존해서 생활하게 된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고 몸무게는 고도비만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꿈도 그 어떤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고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병원에서 선생님께서는 늘 말씀하십니다. 조울증인 양극성장애인 김은숙 씨는 죽을 때 까지 약을 끊으면 재발률이 높아 뇌에 영향을 주고 일상생활이 점점 더 불가능해 지며 치료에 회복시간 또한 늦게 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상담을 하면 늘 말씀하셨습니다.


가족들은 말합니다
. 왜 너였냐고?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너에게 그렇게 크나큰 병이 찾아왔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꽃다운 20대에 활짝 핀 밝은 웃음을 가진 너에게 그런 무섭고 힘든 정신장애가 온 거냐고? 저 역시 늘 의문에 든든한 삼성 대그룹 회사에서 제 꿈의 날개를 펼치고 싶었고, 탄탄 순리대로만 나갈 줄 알았습니다. 건강도 잃고 꿈의 직장도 잃고 모든 걸 잃었다고 낙심하며 3번의 아픔으로 발병 및 재발을 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아낌없이 챙겨주고 보살펴주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안아주시던 엄마, 그리고 언니들과 동생, 그리고 친구들, 그 외에도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건 제가 인생을 막 살지 않았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초창기 발병 후 입 퇴원 후 상태가 심각해 담당 선생님께서 장애인등록을 권하셨고 장애인증명서를 발급받은 후 장애접수를 하게 되었고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부에서 장애인에게 복지 혜택이 많이 지원이 되겠다 싶어 망설이다가 복지카드까지 발급받게 되었습니다. 제 병에 관련된 긴 시간을 이렇게 짧게나마 요약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인 저와 비장애인인 저의 신랑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200778일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께서 지금의 배우자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배우자는 타 교회에 다니던 중에 소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이 있던 날, 어쩜 아빠처럼 포근하고 자상하고 편안하고 참 따뜻한 사람임에 저의 마음을 뺏기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인연의 끈인가 봅니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신랑은 프로포즈를 해 왔고
,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제가 장애인이고 조울증이 있어 정신의학과 진료 및 꾸준히 약복용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배우자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잠시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아 이런 나를 좋아하긴 힘들겠지? 결혼까지? 그리고 평생 이런 나와함께 언제 재발할 지도 모르고, 또 죽기 전까지 그 어떤 위험부담을 갖고 살아가야 할텐데... 하며 이 사람과의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을 때,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괜찮다고
, 사랑할 수 있다고, 다 덮고 내가 견딜 수 있다는 이 사람의 말을 통해 다 감당하리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내가 결혼을 할 수 있고 이 상황에 아이까지 그리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며 10개월간의 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었기 때문에 저의 장애부분에 대해 시부모님도 아셔야 했습니다
. 어느 부모가 장애가 없는 자가 장애가 그 것도 정신장애가 있는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려 하겠습니까? 무척 큰 반대에 무릎 쓰고 지금의 배우자가 결혼까지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2018524일 저희 둘은 백년가약을 했습니다. 1년 반 후에 자녀를 낳고 재발과 동시에 폐쇄병동 입원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시부모님이 살뜰히 양육해 주셨고, 지금은 9살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2013년 이후 지금까지 재발도 없이 일반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한 가정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것 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정신장애가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주저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시댁에게도 떳떳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저는 사회복지사 2급도 취득하고, 올해 84년제 사회복지학과도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순탄하게 졸업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학점은행제를 통해 편입해 나머지 2년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사이버를 통한 학업도 쉽진 않았습니다. 이를 성취하고 난 후의 그

자존감은 향상되었고, 또 다른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과후지도사1, 심리상담사1급도 취득하였고, 워드, 컴활, 사무자동화산업기사 등 거의 10년 전 딴 컴퓨터 자격증이라 현재 사용하기엔 미흡하여 올해 ITQ자격증도 취득하였습니다. 한글, 엑셀, 파워포인트 3과목 동시에 A등급을 받아 OA자격증도 취득하였습니다. 이를 발판삼아 저는 사회복지사로 역량을 넓혀갈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장애인이 있는 곳이나, 어르신이 있는 복지센터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전문가다운 자로 거듭나기 위하여 지금도 정진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시간과 그 모든 노력들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면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라고 정신장애라고 아무것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아니라 더 바르고 세상을 더 밝게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반인이라고 해서 장애가 언제 찾아온다고
? 예언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기 때문에 굳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제 생활에 만족하고
, 비록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보면 왜 내가 장애를 입고 힘든 시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 또한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서 저에게는 결혼생활이 축복이자 든든한 이 세상의 하나뿐이 내편도 생기고, 둘 사이의 건강한 아이 또한 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선물을 주시려고 더 값지게 느끼라고 제게 이런 장애를 주신 건 아닌지?


이제 나이가
40이 되고나니 조금 철이 드는 것도 같습니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의 저의 세월속의 추억들을 지금 이 글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저는 당당히 그리고 여전히 꿈을 꾸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동행을 지금의 배우자와 그리고 가정을 꾸린 저로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찬란한 인생을 꿈꿀 테지만
, 굴곡이 있고 저에게는 그런 굴곡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서서히 제자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꿈을 잃지 마세요!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당당히 도전하세요!. 나약해 지지마세요!. 최종결정은 하상 자신이라는 점 잊지 마세요!. 저 또한 그렇게 남들보다 잘난 것이 많은 것 또한 아니고 부자인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건강하고, 배우고 싶은 걸 배워나가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그 주인공은 바로 자신인 것 같습니다. 힘을 내세요! 할 수 있어요! 저도 해 냈잖아요!


장애인도 존중받고 차별 없는 장애인복지가 어둠의 그림자에서 따뜻한 불빛으로 비춰질 그 날을 기도해 봅니다
.